“먼 곳의 정원에서 먼 곳의 잔디를 깎는 게 좋았다.
먼 곳의 길에서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 안자이 미즈마루
두 거장의 글과 그림이 만나 탄생한 일러스트 픽션 북!
무라카미 하루키 초기 대표작 「오후의 마지막 잔디」
오직 이 소설을 위한 안자이 미즈마루의 청량한 일러스트
무라카미 하루키는 환상적이고 무게감 있는 장편소설만큼이나 심플하면서도 감각적인 단편소설을 집필하는 데도 열정과 애정을 쏟아왔다. 그 시작점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초기 대표작으로 「오후의 마지막 잔디」가 있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는 1982년 잡지 〈다카라지마〉에 발표되었다가 이듬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 세계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경쾌하고 청량한 일러스트로 사랑받아온 예술가이자 그 누구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는 친구로서, 오랜 세월 하루키와 환상적인 호흡으로 다채로운 협업을 선보였다. 그중 「오후의 마지막 잔디」를 위해 그린 총 20점의 일러스트를 1987년 잡지 〈다테구미·요코구미〉에 최초로 발표했다.
여름이었다. 그것도 흠뻑 반해버릴 만큼 멋진 여름.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태양은 지글지글 살갗을 태웠다. 내 등가죽은 세 번 벗어지고 이젠 완전히 새까매져 있었다. 귀 뒤까지 새까맸다. 마지막 일을 하는 날 아침, 티셔츠와 반바지, 테니스화에 선글라스를 끼고서 라이트밴을 타고 내게 마지막이 될 정원으로 향했다. 차 라디오가 망가져 집에서 가져온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로큰롤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 크리던스나 그랜드 펑크였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여름의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본문 28p)
그후 긴 시간을 지나 안자이 미즈마루 타계 10주기(2024년)를 기리며 두 거장의 글과 그림이 온전한 한 권의 책으로 엮여 기념비적인 ‘일러스트 픽션 북’이 탄생했다. 한여름 잔디깎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와 그 계절의 감각을 물씬 발산하는 그림이 한데 담긴 이 일러스트 픽션 북을 통해 더욱 생생하고 색다른 느낌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
1949년 교토 출생.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1987년 『노르웨이의 숲』으로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2005년 『해변의 카프카』가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2009년 『1Q84』, 2017년 『기사단장 죽이기』, 2023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등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큰 화제를 모으며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2006년 프란츠 카프카 상, 2009년 예루살렘상, 201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문학상, 2023년 아스투리아스 공주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그림 : 안자이 미즈마루
1942년 도쿄 출생. 니혼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아트 디렉터로 근무했다. 1981년부터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북디자인, 광고, 만화, 소설, 에세이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공동 작업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전6권) 『밤의 거미원숭이』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윽고 슬픈 외국어』 등이 있다. 2014년 7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역자 : 양윤옥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옮긴 책으로 『1Q84』 『여자 없는 남자들』 『중국행 슬로보트』 『일식』 『장송』 『가면의 고백』 『철도원』 『유성의 인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헌치백』 등이 있다. 『일식』으로 2005년 일본 고단샤가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여름이었다. 그것도 흠뻑 반해버릴 만큼 멋진 여름.
발바닥에 느껴지는 시원한 초록빛 감촉을 즐겼다.
19살의 ‘나’는 여자친구와 여행을 가기 위해 한여름 아르바이트로 잔디 깎는 일을 한다. 하지만 어느 날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가 도착하고, 돈을 모을 이유가 없어진 나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다. 다만 한 번만 더 일을 맡아달라는 사장의 부탁에 마지막으로 잔디를 깎으러 길을 나서고, 마침내 도착한 가정집 정원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집주인을 맞닥뜨리게 된다.
기계보다 수작업을 선호하는 나는 오랜 시간 공들여 잔디를 깎는 와중에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여자친구와의 기억 때문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한편, 오전부터 위스키를 홀짝이며 왠지 모를 위압감을 풍기는 집주인도 신경쓰인다.
아무튼 나는 계속 잔디를 깎았다. 정원에는 대부분 잔디가 길게 자라 있었다. 마치 풀숲 같다. 잔디가 길면 길수록 보람이 있었다. 일이 끝나면 정원의 인상이 확 달라지는 것이다. 이건 정말 멋진 느낌이다. 마치 두툼한 구름이 싸악 걷히고 햇빛이 일대를 가득 채우는 듯한 느낌. (본문 26p)
세번째로 벨을 눌렀을 때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중년 여자가 나타났다. 무시무시하게 큰 여자였다. 나도 결코 몸집이 작은 편이 아닌데 그녀가 나보다 3센티미터는 더 컸다. 어깨도 넓고, 꼭 뭔가에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나이는 대략 쉰 전후일까. 미인까지는 아니어도 이목구비가 단정했다. 하긴 단정하다고 한들 남들에게 호감을 살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짙은 눈썹과 네모진 턱에서는 일단 말을 뱉으면 결코 무르는 법이 없을 듯한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본문 38p)
내리쬐는 태양빛, 시원한 아이스커피와 라디오 음악, 그리고 우거진 나무들과 초록빛 잔디. 나는 청량한 여름 속에서 마지막 잔디깎기 일을 마친다. 여자친구 때문에 마음은 복잡했지만 그럼에도 차분히 일을 마무리하고 떠나려는 그때, 집주인이 보여줄 게 있다며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하고 나는 미심쩍지만 일단 그 말을 따르는데…… 잔디를 깎으며 보낸 여름, 유난히 선명하고 비현실적이었던 하루, 그리고 이별을 통보받은 순간. 그 모든 나날을 품고서 나는 무사히 이 계절을 통과할 수 있을까.
책 속에서
거기서 기억이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난다. 이건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영구운동 기계와도 같다. 그것은 온 세상을 덜컹덜컹 돌아다니면서 땅바닥에 끝없는 선 하나를 긋는다. (11p)
혼자 있을 때는 내내 로큰롤 레코드를 들었다.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이란 다 그런 법이다. (16p)
멀리멀리 가는 게 좋았다. 먼 곳의 정원에서 먼 곳의 잔디를 깎는 게 좋았다. 먼 곳의 길에서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32p)
그녀가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아래서 올려다보니 꼭 녹나무 같았다. 오른손에 유리잔을 들고 있었다. 잔에 든 얼음과 위스키로 보이는 액체가 여름 햇빛에 반짝이며 출렁였다. (48p)
나는 라디오를 끄고 맨발로 잔디 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만족스러웠다. 빠뜨린 곳도 없고 들쑥날쑥한 곳도 없다. 융단처럼 보드랍다. 나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잠시 발바닥에 느껴지는 시원한 초록빛 감촉을 즐겼다. (56p)
그녀의 존재가 살금살금 이 방으로 숨어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렴풋한 흰색 그림자 같았다. 얼굴도 팔도 다리도, 아무것도 없다. 빛의 바다가 만들어낸 아주 작은 뒤틀림 속에 그녀는 존재했다. (84p)
길 양옆으로 다양한 집이 서 있고 다양한 정원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있었다. 나는 핸들을 붙든 채 내내 그런 풍경을 바라보았다. 라이트밴 짐칸에서 잔디기계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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