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절판되어 더는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우리 시대 대표 시집을 선보이는 걷는사람 ‘다;시’ 시리즈 열네 번째 시집으로 임곤택 시인의 『지상의 하루』가 복간되었다.
『지상의 하루』는 “묵묵히 제 앞에 주어진 삶을 견디며 결국 자신마저 튕겨 낼 정도로 갑갑해하는 지경에 이르러 게워 낸” 일상의 풍경과 시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려한 수사나 과장되고 극적인 감정 토로가 없어 얼핏 슴슴하게 느낄 수도 있으나 그것이 삶을 이고 지고 견디는 삶의 본질적 편린임을 모두 알고 있다. 임곤택 시인이 절망과 비애와 고통, 허무를 다루는 방식은 절규가 아닌 다정하고 온화한 굽어보기이자 “겸허하고도 단아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유성호 평론가의 말처럼 “어젯밤에서 시작하여 오늘 새벽을 맞고 아침 오전 정오 하오 일몰 저녁 밤으로 흘러가 결국 내일에 이르는 상상적 과정을 일관된 서사 충동으로 그려 낸다. 일상의 범용하고도 단조로운 되풀이 속에서 비루하고도 소중한 삶의 속성을 ‘하루’의 은유로 들려주는 것이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진만을 통해 임곤택 시인의 시가 다시 조명받기도 했지만 어쩌면 드라마 이전부터 임곤택 시인은 우리 삶의 무가치함과 가장 치열하고도 담담하고 묵묵하게 싸우고 있었다. 피로하고 허허롭고 처절한 하루를 견디게 하는 불행의 위로이자 동행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우리에게 ‘지상의 하루’를 건넨다. 그의 언어가 우리의 허무를 조금은 더 버틸 수 있게 해 준다. “일상에서, 일상을 위해, 일상의 목소리로, 일상과 싸우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침이 다시/아침이 되는 일의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오늘과 일상 혹은 삶 그리고 “그대 담장의 그늘 아래 발을 찔러 넣는다/확인하고 싶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목차
1부
그동안 내내
그대에게 닿는 허기
4월
여자와 느티나무
얼굴을 씻다
일몰
피아니스트
거인
한나절의 생각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당신과 나의 숲
blues for nothing
스프링클러
10월
처음 온 와 본 듯한 곳
무서운 크리스마스
우리는 서로의 입을 막고
목련 아래 비를 피하다
짐을 싸다
2부
국화빵 만드는 여자
실낙원
박물관의 저녁
그 남자를 떠올려
이런 안부를 묻다
그림 맞추기
대개는 음화 같은
시민의 의무
이런 게 필요한 아침
여름의 짧은 기록
거리
비 갠 다음의 K씨
지금까지 그때부터
키 큰 나무들의 방
B. B. King
300km
물에 잠긴 아침
다산성에 대하여
3부
이름을 바꾸다
천정에 숨어 말 거는 자에게
고생대로부터의 발자국
얼룩
기미
어둡고 넓어서
침묵과 뼈
플라타너스
늘 옳고 이기는 쪽
내 이마의 청동 거울
매듭은 나비 모양으로
산책
풍향은 상관없고
벽화
습관적 실패
부지런한 난쟁이
쉽게 보내는 하루
해설
허무를 견뎌 내는 방식-조재룡(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저자 : 임곤택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2004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지상의 하루』『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과 시론서 『현대시와 미디어』가 있다. 고려대 교양교직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무엇인가 멀어졌고 어딘가는 더 가까워졌다
아침과 나무와 반복하는 몇몇 이미지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렇게 침침한 채로 아침을 맞고 나무 사이를 걷는다
2026년 봄 임곤택
책 속으로
당신이 지어 준 죄를 갖고 나는 태어났다
당신을 닮은 들판과 들판의 소나무를 닮는 일
나는 서두른다
허공의 거대한 활을 보았으므로
당신으로부터 낱낱이 적중하는 나는 광기 들린 나뭇잎
하나의 몸으로
어떻게 여러 번의 추락이 가능한지
물과 소금은 잠시 혀를 지나고
열 개의 바람개비가 돈다
열 개의 종잇장 같은 바람이
노인의 얼굴을 덮고 그네 뒤로 숨는다
한 조각 마른 빵에 몰리는 푸른 거품
주인이 바뀐 폐염전 바닥에
반짝거리는 빛
확인하고 싶은 사랑이 있다
---「그대에게 닿는 허기」중에서
물속의 제 얼굴을 가지려던 그이처럼
세상은 가난하고 야윈다
땅 위에 흰 젖을 뿌리는 목련의 나라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은 반드시 슬픈 것
---「4월」중에서
너의 비극이 탐날 때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지
너의 고독한 때가 탐날 때‘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지
네가 온순해지면 아무도 너를 그리워하지 않고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용서했다
짓는 대로의 낯빛으로 증오가 잦아들고
아름다운 노래는 불리지 않고도 끝내 아름다운
그런 세상으로
---「우리는 서로의 입을 막고」중에서
간밤의 꿈을 한 조각도 줍지 않고 아침을 맞는다. 문을 두들기는 햇살의 행상行商, 동분서주의 수다스런 자투리들. 찬물 한 컵으로 어제의 나 모른 척하기, 어제와 다른 말투로 말하기.
골목은 길고 수다스럽다. 한물간 사내들이 모여 소줏값을 걱정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의 비린내. ‘기표소’라고 쓰인 휘장을 젖히고 처음 맡았던 냄새. 나란히 번호를 붙인 사생결단의 빈칸들.
어린 연인들이 좁은 골목으로, 잘 맞는 신발처럼 척척 나아갈 때, 가장 먼저 서쪽에 닿은 사람은 아침 인사의 격식을 이해한다. 방바닥에 그려지는 긴 수형도. 일몰은 너무 재빨라 한 장으로는 다 그릴 수 없지.
---「그림 맞추기」중에서
귓속말을 하고
귓속말을 듣고 싶은 때
비 올 확률 80퍼센트의 대기
빛 쪽으로 몰리다가 휘발하는 손톱
예언자의 손가락질로
빈 병을 집어 드는 누더기의 사내
애초부터 그쯤에서 그렇게 멈춘 것 같은
너의 발밑 팽팽하게 당겨진 길
녹슨 가위
---「비 갠 다음의 K씨」중에서
플라타너스가 플라타너스 가지를 사방으로 뻗는다
오늘은 뭔가 자꾸 줄어든다
짐승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시 이름을 바꾸는 것
세탁소 주인의 물음에 가명을 대고
한 생애를 약간 들어 올렸다고 믿는다
---「이름을 바꾸다」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햇볕
바람과 이파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잦아드는 그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고 생각하는 그녀처럼 나는 있는 것을, 없다고 느낀다
---「기미」중에서
삶에서 기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들, 감정 그대로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들, 어느 한순간에 찾아든 저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 그 어떤 희망이나 심지어 절망조차 부여잡기 힘겨운 존재들의 다변적인 모습을, 마치 한 삽에 움푹 찍어 흙을 나를 때 그렇게 하듯, 그것도 “너무 빠르거나 놀랄 만큼 느리지 않게”(「10월」), 시집 안으로 옮겨다 놓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 연시戀詩의 형식을 차용해 온 작품들에서조차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사랑 타령이나 감정의 기울어짐이 아니다. 가령 “백 일은 붉고/백 일은 없는 내 사랑” 같은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 ‘붉거나 그렇지 않은’이라는 고리타분한 이항 대립적 반복의 굴레로 하루가 채워진다는 것이며, 우리의 처절한 삶과 애절한 사랑조차 알고 보면 이렇게 “흔한 이야기(「그대에게 닿은 허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해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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