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으면 끊고, 맞지 않으면 멀어진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처럼 때가 다하면 흘려보내는 관계도 자연스러워진 시대다. 그런데 어떤 인연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좋아했다가 실망하고, 미워했다가 다시 만나면서도 오래 곁에 남는다. 『사는 게 뭐라고』로 삶의 우스움과 본질을 거침없이 이야기했던 사노 요코가 이번에는 바로 그런 ‘사람’에 대해 말한다. 국내 독자에게는 나이 듦과 죽음까지 농담거리로 만들던 시니컬한 독설가로 익숙하지만, 『친구는 쓸모없다』에서는 조금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생각보다 정이 많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오래된 인연을 그리워한다. 타인의 못마땅한 점을 재빨리 알아채면서도 그것만으로 한 사람을 재단하지 않는다. 까칠하고 제멋대로인데 속절없이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노 요코’를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친구는 쓸모없다』는 사노 요코의 자전적 에세이와 지인들과의 대담이 교차하며 그의 삶을 이루어온 관계들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특히 ‘친구 없이는 못 산다’는 사노 요코와 ‘친구 없이도 별문제 없이 살아왔다’는 일본 현대시의 거장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화는 시종 엉뚱하고 경쾌하다. 훗날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는 두 사람이 아직 ‘친구’의 거리에서 마주 앉아 떠들고 반박하고 웃는다.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는 어느새 서로 얽히고 부대끼며 사는 이야기로 번져간다.
사노 요코에게 친구는 도움이 되어야 하는 사람도,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존재도 아니다.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몇 시간씩 바람을 맞고, 실연한 친구 곁에서 해줄 일이 없어 가쓰오부시나 깎는 일. 이 책은 그런 사소하고 무용한 시간을 우정의 한복판에 놓는다. 무엇이든 효율과 쓸모를 따지는 시대에 『친구는 쓸모없다』라는 제목이 묘하게 통쾌한 이유다.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만나고, 아무 목적 없이 시간을 써버릴 수 있는 사이. 이 책은 좋은 사람만 남기라고 말하지도, 오래가는 관계의 비결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함께 지낼 수 있고, 싫은 구석까지 알아버린 뒤에도 정은 남는다. 시시콜콜해서 웃기고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는 사노 요코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타인 때문에 복잡했던 마음도 어느새 조금 가벼워진다.
목차
1장.
아이로 사는 건 괴로워
친구가 필요 없는 사람도 있다
삼각관계도 배워야 한다
2장.
부모 말고 다른 사람이 필요할 때
괴롭힘당해서 오히려 좋아
우정을 쌓으려고 노는 게 아니야
중학생이 되면 달라지는 것들
3장.
저마다의 인생이 시작되는 거야
좋아하는 아이
조금씩 인생이 시작된다
4장.
정은 또 다른 정을 부른다
위선도 배울 필요가 있다
여자애들끼리
다툼과 화해
무의미한 것이야말로 중요해
우정은 계속된다
5장.
어른이 되면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하지
모두가 나를 오해하는 것 같아
남에게 상처를 준 아픔
다른 인간에게 익숙해진다는 것
하여간, 다들 제멋대로라니까
마무리하며
해설: 그 시절, 친구가 있었다는 작은 행복에 대하여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사노 요코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전쟁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무사시노미술대학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백화점 홍보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1967년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 베를린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 1971년 『염소의 이사』를 펴내며 그림책 작가로 데뷔했고 그림책과 동화, 소설, 에세이 등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일본 그림책의 고전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비롯해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시즈코 상』, 『문제가 있습니다』 등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잇달아 선보이며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고단샤 출판문화상, 쇼가쿠간 아동출판문화상, 고바야시 히데오상 등을 수상했고, 2003년에는 일본 정부가 학문·예술 분야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자수포장紫綬褒章을 받았다. 2010년 72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날카로운 통찰과 유머가 담긴 그의 문장들은 지금도 새로운 독자와 만나고 있다.
역자 : 이소담
동국대학교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일본어의 매력에 빠졌다. 읽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책을 우리말로 아름답게 옮기는 것이 꿈이자 목표다. 지은 책으로 『난생처음 번역』, 『그깟 ‘덕질’이 우리를 살게 할 거야』, 『소설, 첫 번째 계절』(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마스다 미리의 『중년에 지친 밤에는』, 『오늘의 인생』, 아베 아키코의 『카프네』, 요시타케 신스케의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히로시마 레이코의 『어떤 은수를』, 『십 년 가게』 시리즈 등이 있다.
“신묘하게 경쾌하다.
우정 미만, 우정 초과의 인간관계를 아우르는 절묘한 통찰.”
★이다혜 작가 강력 추천★
친구는 인생에서 꼭 필요한 존재일까? 일본 그림책의 고전 『100만 번 산 고양이』와 베스트셀러 에세이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 요코가 이번에는 인간관계를 들여다본다. 유년 시절의 질투와 괴롭힘, 무리 짓기와 절교, 동경과 배신감,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까지 관계의 민낯을 거침없이 들춰낸다.
『친구는 쓸모없다』에는 어린 시절의 친구부터 부모와 형제, 아들, 이웃과 오랜 지인까지 그의 삶을 거쳐 간 온갖 인연이 등장한다. 사노 요코는 그들과의 추억을 미화하지 않는다. 누가 얄미웠고 누구에게 상처받았으며, 자신은 또 얼마나 유치하고 못되게 굴었는지도 빼놓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누구에게나 못마땅한 구석 하나쯤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진다. 친구란 어쩌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이 아니라, 이상한 구석까지 알고도 곁에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말이야, 싫은 면이 전혀 없는 사람과는 친구로 오래 지내지 못해. 상대의 싫은 면까지 다 포함해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으로 인식하는 습관이 있나 봐. 그게 훨씬 현실적이라 좋아.”
― 127쪽
친구는 역시 있어야 한다는 사노 요코,
친구 없이도 잘 살아왔다는 다니카와 슌타로.
두 사람은 끝없이 떠들고 삐지고 웃는다.
대화는 자꾸 옆길로 새는데
이상하게 거기가 제일 재미있다.
“그러다 보면 부모님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 생기기도 하겠네?”
“그야 당연하지. 부모는 적이니까.”
― 91, 92쪽
책의 한 축은 사노 요코와 일본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담이다. 정반대의 두 사람은 우정과 가족, 연애와 결혼을 넘나들며 티격태격하고, 진지해지는가 싶으면 엉뚱한 기억으로 빠져든다. 대화는 자주 옆길로 새고 기억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결국 ‘다른 인간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모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대담 당시 두 사람이 아직 결혼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1990년 부부가 되어 1996년 이혼한 두 예술가가 한때 ‘친구’의 거리에서 사랑과 우정, 인생을 논하는 모습이 묘한 재미를 더한다.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성격과 관계의 결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자신의 삶을 스쳐 간 이들을 돌아보는 사노 요코의 자전적 에세이가 사이사이 이어진다.
사노 요코는 열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었을 때 자신을 감싸준 친구들과의 경험이 평생 “인생을 대하는 나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바라보는 관계는 좀처럼 한마디로 설명되지 않는다. 가까웠다가 멀어지고 싫은 점을 알면서도 다시 만난다. 사노 요코는 그런 모순을 굳이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 애초에 앞뒤가 딱 맞지 않는 것이 인간이고, 우정도 그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시시콜콜한 시간을 나누는, 무용한 관계의 기쁨
『친구는 쓸모없다』가 처음 출간된 것은 1988년. 한국 독자에게 익숙한 『사는 게 뭐라고』보다 20년 앞선 책으로, 암과 죽음을 이야기하기 전 쉰 살 무렵의 사노 요코를 만날 수 있다. 세상을 함부로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 현실감각,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정을 봐주지 않는 유머, 인간의 허점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눈도 이미 선명하다. 친구를 들여다보며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쓸모없음’을 대하는 삶의 태도로 확장된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 사람은 곧 땅이자 태양이자 비이다. 나는 쓸모없는 것을 좋아했다.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것,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을 좋아했다. 능률이나 성적이나 발전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것이 제일 중요했다.”
― 218쪽
어쩌면 우리를 오래 붙잡아주는 것은 꼭 필요해서 맺은 관계가 아니라, 아무 목적 없이 시간을 나눈 이들인지도 모른다. 책을 덮을 즈음이면 그런 얼굴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좋아했다가 미워하고, 한동안 잊었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락하는 사이. 그렇게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내며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남는다. 친구는 참 쓸모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사이가 새삼 반갑다.
책 속에서
태어날 땐 누구나 혼자잖아. 당장 주위엔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뿐이고. 그러니 갓난아기 땐 산부인과에 비슷비슷한 아기들이 주르륵 누워있어도, 그 사이에서 우정이 생긴다고 할 수는 없겠지.
- p.11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내게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개인적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정으로 맺어진 집단이 나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호의에 놀랐다.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인간은 모두 다정하다고, 온전히 신뢰를 품을 수 있었던 열아홉 살의 겨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평생 변하지 않을, 인생을 대하는 나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되었다.
- p.118
나는 말이야, 싫은 면이 전혀 없는 사람과는 친구로 오래 지내지 못해. 상대의 싫은 면까지 다 포함해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으로 인식하는 습관이 있나 봐. 그게 훨씬 현실적이라 좋아.
- p.127
이제는 어릴 때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꽃놀이처럼 한순간 터지고 마는 기쁨이나 슬픔보다, 오래오래 인생과 함께 살아가는 편이 재미있어.
- p.161
친구는 세월을 들여 사귀는 법이지. 하지만 그 세월의 속도가 늘 원만하게 흐르지는 않아. 경험이 다르고 사는 게 다르니, 엇갈리고 삐걱거리는 때가 오기 마련이야.
- p.186
친구 부모님은 나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셨을 거야. 좋은 친구야말로 가장 나쁜 친구인데 말이지.
- p.199
홋카이도의 라일락과 우리 집에 핀 민들레가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있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반짝반짝 은은하게 빛나는 친구도 있으면 좋잖아.
- p.201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형편이 좋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분에 넘치도록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면 그 행복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 p.209
이 친구는 나의 멍청한 면, 한심한 면, 못난 면, 시시껄렁한 면을 전부 받아주었다. 이 친구가 없었다면 나의 얄밉고 시시한 구석들은 갈 곳을 잃고 내 안에 부글부글 넘쳐났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내가 과연 살 수 있었을까.
- p.215
그 친구 역시 별로 대단치 않은 나를 선택했다.
생각해 보면 친구란 쓸모없는 한때를 함께 낭비하는 사이다.
- p.216
친구라는 존재는 돈이 되지도 않고 사회적 지위 향상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혹시라도 그런 것에 친구를 이용하려고 들면 그것은 우정이 아닌 다른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친구에게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받게 되더라도, 득실을 따지는 건 우정의 목적이 아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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