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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여 안녕: 어느 젊은 예술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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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번호
394340
ISBN
9791199512559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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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2026-09-05
페이지, 크기, 무게 240쪽, 135*222mm, 312g
목차
1 장. 미지의 세계로 데려가는 미지의 기술
1. 젊은 예술가의 초상
2. 사그라든 심원의 불씨로부터
3. 새로운 생, 새로운 세계를 낳는 태동
4. 집 속의 집, 르 라브 라브 Le Lab Lab

2 장. 흰 날갯짓의 파동을 따라서
1. 살갗을 스치는 무수한 흰 날개들
2. 죽은 자와 촉각의 대화
3. 이 경이로운 물질의 나라

3 장. 만지고 만져지는 사물들의 촉수 속
1. 혼돈을 타고, 뚫고 나오라
2. 세계를 맞아들이는 환희
3. 소리의 사원에서

4 장. 결국 사랑을 말할 수밖에
1. 무지개의 약속
2. 중세의 방을 지키는 눈동자

5 장. 바닷길로 먼 항해를 떠날 때
1. 깊음, 기쁨과 기품이 있는 곳으로
2. 시간의 물결 속으로 보내는 나무 그림
저자소개
저자 : 형린(Lynn Hyeong)
형린 Lynn Hyeong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대예술 분야 연구원으로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준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뒤, 2015년 파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후 파리 15구의 오래된 집 '르 라브 라브(Le Lab Lab)'에서 회화, 설치, 공연을 아우르는 창작 활동에 몰두하며, 파리 8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예술과 미디어를 통한 에콜로지' 학과에서 생태예술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작업은 파리, 부다페스트, 소피아, 런던, 타이중 등지의 전시와 프로젝트로 확장되었으며, 생드니의 창작 커뮤니티 [60AdaDa]의 일원으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파리의 갤러리 '앙프레시옹(Impressions)'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동명의 연구서를 예술 작품으로 구현했다.
현재 형 린은 대만 타이중 동해대학교의 강사이자 레지던시 아티스트로서 현대예술을 강의하고 있다. 삶의 구원과 환희를 전하는 예술의 본질적 물음을 중심에 두고, '르 라브 라브 2(Le Lab Lab 2)'로 명명한 작업 공간과 강의 자체를 하나의 예술적 실천으로 확장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예술이 아니었다면 끝내 세상에 매개될 수 없었을 사람. 예술이 사람을,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은 진짜다.”

파리 15구 막다른 골목, 지붕에 구멍이 뚫린 채 105년을 버텨온 집, 저자는 이 집을 "르 라브 라브(Le Lab Lab)"라 부르며 8년을 살았다. 이 책은 그 집에서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다. 정원 지하실에서 발견한, 이미 세상을 떠난 인도 피리 연주자의 방치된 그림들을 되살려낸 영혼의 협업. 코로나 봉쇄 속에서 나눈 이방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 그리고 마침내, 오래된 나무판에 그린 그림 한 점을 노르망디의 바다에 흘려보낸 순간까지 창작과 실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컬러 도판 100여 컷과 함께 담아냈다.
8년의 여정, 그림 한 점을 바다로 흘려보내다
2024년 5월, 저자는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작업 〈슬픔이여 안녕, Plus de Chagrin〉을 완성한다. 버려진 나무 마룻바닥에 수개월간 빗물과 물감을 섞어 만든 이 그림을, 그는 노르망디 해안(북위 48도 59분 28.7초, 서경 1도 33분 57.8초)에 직접 놓아 바다로 떠나보냈다. "그것을 바다에 보내는 순간, 예술은 소유가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장면을 끝으로 파리에서의 여정은 마무리되고, 저자는 삶의 무대를 대만으로 옮긴다.
철학에서 예술로, 그리고 사랑까지
책에는 2015년 파리에서 만난 대만인 사진작가 마이크(Mike Ou)와의 사랑, 그리고 2019년 결혼에 이르는 과정도 담겨 있다. 그렇게 저자는 이 세상에 '매이는' 기쁨을 배운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끝내 세상에 매개될 수 없었을 사람. 예술이 사람을,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은 진짜다"라는 저자의 고백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가족들조차 믿기 어려워했던 그 결혼은, 떠돌던 삶이 마침내 한 장소와 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매이는' 이야기로 완결된다.

책 속에서

P26
그 무렵, 한편으로 나는 프랑스 파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퇴직금과 가능한 모든 것을 쏟아, 당분간 어떻든 생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신세 진 어느 지인에게 이 불길을 전하고, 나는 프랑스로 떠났다. 그분은 내가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것은 나에게 생존과 존엄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다.

P34
그 사고가 일어났던 밤이었다. 세상은 마치 모든 것이 잠든 듯 고요했지만,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내 몸 전체를 덮고 있는 짙고 무거운 어둠을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울려 퍼지는 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있었다.
“너는 이제 끝났어.”
“너는 이제 끝났어.”
“너는 이제 끝났어.”
그 목소리는 단순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 깊숙한 곳, 뼛속까지 파고들며 내 존재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 몸 깊숙한 어느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그 냉소에 가득 찬 소리가 반복되었다. ‘끝이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의 공명은 곧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을 떠나야 하며,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절박한 갈망으로 변했다. 나는 그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갈망을 붙잡고 살아남으려 애썼다. 그리고 말 그대로 생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P46
이 집은 정확히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하실, 반지하의 스튜디오, 1층 거실과 작은 부엌, 그리고 2층의 두 개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붕에는 이미 내가 들어가기 오래전부터 구멍이 뚫려 천으로 그 구멍을 가려 놓고 있었다. 때때로 집주인 트리스탕(Tristan)은 지붕 위에 올라가 그 구멍을 메우고는 했다. 나는 옆집 지붕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햇빛을 쬐고, 나무들에 둘러싸여 작업을 했다. 이곳은 주로 덴마크인들이 그들 커뮤니티를 통해서 처음 파리에 와서 머무는 곳이었다. 나는 트리스탕이 처음으로 맞아들인 한국인 손님이었다. 트리스탕은 미국의 방송국 NBC에서 사진 기자를 오래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큰아들이 코펜하겐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트리스탕을 찾아왔다. 바로 옆에 같은 정원을 끼고 있는 그의 집은 크고 작은 카메라들과 삼각대로 가득 차 있었다.

p132
창작의 길은 예측 불허, 지극히 유동적이다. 하나의 행위가 다음 행위를 낳고, 다음 행위를 낳고, 다음 행위가 이전의 행위를 바꾸고, 이후의 행위가 최초의 구성을 바꾼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뒤섞이며 현재, 과거, 미래가 여러 층위로 포개 진다. 이렇게 예술가는 애정 어린 관찰자가 된다. 그 관찰 속에서 관습적인 상징에서 탈피한, 살아 꿈틀거리는 관계의 형상이 피어난다. 예술은 곧 그가 놓인 환경이기도 하다. 흙, 미생물, 사람. 살아 있는 것과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과 같다. 그 씨앗이 어느 자궁 속에서 숨 쉬다, 마침내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예술 작품은 살아 있는 생태계다. 탄생과 재탄생을 거듭하며, 변신하는 물질의 숨결을 품는다. 예술계 역시 살아 있는 생태계다. 그 속에서 다양한 정치·사회적 힘들이 얽혀 나간다. 예술가는 그 스스로 그 생태계의 안과 밖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생물이다. 여러 힘들의 역동과 역경 속에서 햇빛, 바람, 토양, 그 생태계의 지도를 그려 나가는 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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