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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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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번호
397719
ISBN
9788954476805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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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2026-09-15
페이지, 크기, 무게 168쪽, 124*192mm, 218g
목차
프롤로그
1 시작
2 지옥에서의 첫 번째 주
3 102년 째: 가장 의미 있는 글
4 1145년 째: 커다란 상실
5 끝없는 심연
부록
옮긴이의 말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스티븐 L. 펙 STEVEN L. PECK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족제비에 관한 장대한 서사시 한 편을 썼다. 그야말로 비애와 모험, 가슴 아픈 슬픔으로 가득 담겨 있었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시가 되었을 수도 있을 텐데, 아쉽게도 잃어버렸다. 선생님은 내가 그 시를 반 친구들에게 읽어주는 걸 꽤 마음에 들어했다. 나중에, 거의 매일 학교에서 집까지 쫓아와 나를 때리려고 끈질기게 괴롭히던 아이가 있었다(물론 나를 절대 잡지는 못했다. 당시 나는 사슴처럼 빨랐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언젠가 나에게 와서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눈물이라니!) 말했다.
“펙. 이건 지금까지 네가 쓴 것 중 최고야!”
시가 가진 힘! 나는 그 순간부터 작가가 되는 데에 꽂혀버렸다.

■■■ 옮긴이
김항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공과대학교와 영국 시티세인트조지 런던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천국제공항에서 근무했다. 이후 프리랜서 번역가로 전향해 방송사와 기업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현재 출판번역 에이전시 글로하나에서 다양한 분야의 영서 리뷰와 번역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터스크』 『검은 밤의 여자들』 『바닷속의 산』 『그녀가 죽였다』가 있다.
출판사 서평
★★★★★ 아마존 SF·호러 1위
★★★★★ 굿리즈 별점 10만 개 돌파
★★★★★ 2026 펭귄 빈티지 클래식 선정

우주보다 거대한 사후 세계 도서관
탈출법은 단 하나, 내 인생이 적힌 단 한 권의 책을 찾는 것

인류는 오래전부터 사후 세계를 여행해왔다. 고대의 저승에서 단테의 『신곡』, 근현대의 소설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천국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화려하게 변해왔지만, 지옥은 역사와 종교를 초월해 놀라울 만큼 끈질기게 일관된 모습을 계승해왔다. 불, 어둠, 죄에 대응하는 형벌, 끝없는 고통. 단테는 죄의 종류에 따라 지옥을 아홉 개의 구역으로 정교하게 나누었고, 그 입구에 “여기로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장을 새겼다. 지옥은 무엇보다 ‘희망이 끝나는 곳’이었다.
21세기의 사후 세계는 조금 더 사무적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굿 플레이스〉는 한 인간의 생전 행동을 점수로 환산해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를 배정하고, 배드 플레이스의 고문 방식은 개인의 약점에 맞춰 효율적으로 설계된다.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의 악마도 비슷한 일을 한다. 전자책 리더기 같은 기기를 들고 주인공 소런의 이력을 훑다가 기록 한 줄에서 멈춘다. “어디 보자, 책 읽는 걸 좋아했군……. 아니, 책을 꽤 사랑했던 것 같아. 흥미로운데.” 그리고 그 책 애호가를 도서관에 보낸다. 이 작품에서 지옥은 무차별적인 불구덩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취향까지 읽고 설계된 개인 맞춤형 베이스캠프다.
소런은 하느님을 믿는 독실한 신자로 살았고, 죽은 뒤 아내와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살 것이라 평생 믿었다. 그런데 지옥에 체류하는 동안 지킬 것을 요청받은 아홉 가지 조항은 행정적인 문장으로 그 믿음을 지옥에 온 첫날 지워버린다.

지옥에 들어오기 전에 유효했던 당신의 모든 계약, 의무 관계, 약속, 서약, 맹세 등은 효력을 잃습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되며 이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빚, 결혼, 혈연 및 입양으로 생긴 가족관계, 시민권 요건, 병역의무, 학자금대출 등.
_본문에서

불길 하나 없이 한 인간이 일생 동안 지켜온 가치관을 무너뜨린다. 블랙코미디적이었던 펙의 지옥이 갑자기 서늘해지는 순간이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주인공 소런은 도서관 복도에서 시계를 보려다 이 안내문을 처음 발견했다. 독자가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이러한 가이드는 책을 끝까지 읽고 난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다. 단테의 지옥은 희망을 버리라고 선언한다. 펙의 지옥은 그 반대다. 출구가 있다고, 언젠가는 끝난다고, 계속 희망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아무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이 소설이 상징과 알레고리로 가득한 고전적인 지옥과 다른 차원으로 무서운 이유다.
소런이 도착한 곳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기반으로 지어진 사후 세계 도서관이었다. 이 지옥의 도서관에는 우리가 지상에서 사용했던 문자 조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책이 존재한다. 문법적으로 완벽한 걸작도, 당신이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적은 책도, 당신의 일생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기록한 책도 어딘가에는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책은 의미 없는 문자 나열이다. 탈출법은 심플하다. 자신의 생애가 적힌 책을 찾아 안내판 아래 슬롯에 넣을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도서관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끝은 실제로 존재한다. 바닥에도 언젠가는 닿고, 자신의 책도 이론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완전한 무한이라면 포기라도 할 수 있지만, 유한한 확률은 희망을 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책을 읽고, 책을 버리고, 다시 집어 들고, 난간 아래로 던지고, 또다시 읽을 만한 책을 찾는다. 가능성이 0이 아니기 때문에 희망은 형벌의 일부가 된다.
100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지옥 안에 대학을 세운다. 학장과 교수와 학위가 생기고, 칠면조 뼈로 플루트를 깎고 생 내장을 현 삼아 하프를 만든다. 해마다 무의미한 문자들 사이에서 발견한 ‘가장 의미 있는 글’을 뽑아 시상한다. 죽어도 다음 날 살아나는 세계에서는 폭력조차 끝을 잃고, 광신과 전쟁이 일상이 되는 지경에도 이른다. 펙은 초자연적 괴물보다 더 불편한 것을 보여준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인간은 천국 같은 조건에서도 대학을 짓고, 종교를 창시하고, 계급을 분화하고, 서로를 학대하며, 결국 지상에서 하던 짓을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모든 것조차 지워진다. 같은 서가, 같은 난간, 같은 카펫, 같은 시계, 비슷한 사람과 비슷한 이야기. 주인공은 어느 순간 바퀴벌레 한 마리라도 볼 수 있다면 왕의 몸값만큼의 보물과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를 소멸에 이르게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진짜 지옥은 뜨거운 불구덩이가 아니라 차가운 백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 사람과 1000년 동안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모든 형벌과 같은 시간은 사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준비처럼 보인다. 지옥에 온 지 102년째, 소런은 레이철을 만난다. 둘은 50년에 걸쳐 개에 관해 이야기하고, 몇 년 동안 정말 개처럼 지내며, 〈오징어 게임〉에나 나올 법한 수백 명이 참여하는 술래잡기를 12년 넘게 이어간다. 인간의 생애 몇 번을 합쳐도 닿지 못할 1000년을 함께 보낸 뒤, 소런은 그 시간을 거창한 수사로 술회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_본문에서

1000년은 우리에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이 지옥에서는 한 문단에 접힐 수 있는 찰나다. 그리고 사랑을 잃은 뒤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수십억 년의 낙하와 자살과 부활, 의미 없는 책들을 읽는 반복 속에서 모든 것은 손 우물로 퍼 올린 시냇물처럼 새어나간다. 소런의 손안에 남는 것은 천국의 약속이나 지옥의 교리가 아니라 한때 잡았던 사람의 손에서 전해지던 감각과 그가 존재했다는 기억이다.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가 지옥을 그리는 다른 작품들의 계보에서 갈라져 독자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결국 이야기하고 마는 것은 무한을 상상하기 위해 이 도서관을 지은 게 아니라, 무한 속에서 유한한 사랑이 정확히 어떤 수치를 가지는지 계산하기 위해 지었다는 것.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얻을 그 의미와 값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펙이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의 최전선에 있는 생물철학자라는 사실도 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는 베트남 땀다오 국립공원에서 생태 조사를 하던 중 희귀 세균이 시신경을 통해 뇌로 퍼져 열흘간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회복 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고, 비슷한 시기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런 곳이 실제로 있다면, 그 도서관이 바로 지옥의 모습일 거라고. 그 발상에서 이 작품이 태어났다.
펙에게 살아 있는 우주는 무엇보다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곳이다. 무수한 종과 형태, 저마다 다른 생각과 신선한 이야기가 예측할 수 없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반대로 이 지옥에는 다양성도 창조성도 새로움도 없다. 끝없이 스크롤할 수 있지만 AI의 지문이 찍힌 문장, 비슷한 드림코어 이미지가 주술처럼 되풀이되는 시대에, 새로운 것이 더는 오지 않는 무한한 피드 같은 이 도서관은 유난히 동시대적인 악몽으로 읽힌다.

그 악몽은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펙은 처음 이 소설을 적은 부수로 독립출판한 뒤 친구들에게 책을 건넸고, 해마다 판매가 수십 권 단위로 판매량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고 회상한다. 컬트 클래식으로 불리며 호러 마니아 사이에서 서서히 퍼지던 이 책은 2024년 무렵부터 틱톡에서 급격히 확산됐고 레딧 같은 독서 커뮤니티 유저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추천됐다. 2026년 5월 펭귄은 이 기묘한 소설을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을 지닌 고전 작품을 선보이는 ‘빈티지 클래식’으로 출간해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프란츠 카프카의 『쥐의 족속』을 잇는 라인업에 포함시켰다. “죽어야만 ‘빈티지 클래식’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는 작가의 농담처럼,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는 영원을 다룬 책답게 아주 늦게 자기 독자를 만났다. 출간 십여 년이 흐른 뒤에야 폭발한 사실조차 작품 자체와 닮아 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즉각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시간, 죽음, 삶의 의미 같은 화두를 머릿속에 심어두고 독자를 도서관 난간으로 계속 돌아오게 한다. 책은 짧다. 후유증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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