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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기일지- 은행나무 시리즈 N°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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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번호
398057
ISBN
9791167376862
출판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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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2026-09-11
페이지, 크기, 무게 228쪽, 128*188mm, 228g
목차
잃기일지 …… 007
작가의 말 …… 223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이선진
소설가. 2020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밤의 반만이라도》가 있다.
출판사 서평
두 겹으로 포개지는 시간의 궤도
스스로 미아가 되기를 택했던 계절을 마주하다

출판사에서 타인의 문장을 다듬는 일을 하고, 로맨스 소설 속 오탈자 찾기를 취미로 둔 편집자 진진주에게 삶이란 온전히 몰입하는 무대가 아닌, 객석에 우두커니 앉아 무대 위의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고 “진진주는 마음이 아프다”라며 스스로를 제3자의 자리에 놓아두는 사람. 자신과의 인력을 지워내고 타인처럼 거리를 두어야만 마음이 편한 그는 규정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감정을 극도로 아끼며 일상을 영위해나간다. 모든 것이 겉돌던 12월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소란과 함께 첫눈이 내리고 진주는 뜻하지 않게 시누이의 아이들을 홀로 돌보게 된다. 고요하던 진주의 일상에 침입한 다섯 살 조카 석기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너는 둘 중에 누가 더 좋은데? 만약 둘이 영영 헤어진다 그러면 누구랑 같이 살 건데? 진진주는 그렇게 물으려다 관두었다. 이석기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물었을 때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 “나는 엄마랑 아빠 하나뿐이야!” 자신 있게 소리치는 애였다. ‘하나뿐’의 정의를 지 맘대로 달리했다. (21쪽)

석기는 소떡소떡이 먹고 싶다고 떼를 쓰다가도 막상 눈앞에 대령하면 “이제 안 먹고 싶대요, 쟤가”라며 엉뚱하게 주어를 돌려버린다. 석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은 계속된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다 말고 횡단보도 위에 멈춰 서서 스스로 ‘실종’되기를 자처한다. 건너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기 위한 자리인 양 횡단보도 한복판에 선 조카를 데리러 가며, 진주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던 자신의 내면에 파문이 이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석기의 유치원 가방 속에서 발견된 한 장의 종이―겉보기엔 텅 빈 백지 같지만 연필을 눕혀 살살 문지르면 글씨가 드러나는 깜지―는 석기의 손목에 남아 있던 벌건 시계 모양 자국과 맞물리며 먼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진주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석기의 물음을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남처럼 대하지 않고 스스로처럼 대했다. 인사이드 아웃, 부캐를 안으로 수납하고 본캐를 밖으로 내돌렸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진귀한 순간이었다. 난 나일 뿐이야,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순 없어! (31쪽)

이야기는 낯선 이국의 어학원 지하 방, 역시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겉돌던 아이 ‘펄’과 마주 앉아 써내려가던 진주의 교환 사전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단어의 뜻을 제멋대로 정의하며 마음을 나누던 시간,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것들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영영 잃어버려야만 했던 상실의 계절이, 지워지지 않는 손목 흉터처럼 진주의 시간 속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아닌 ‘진진주’라는 타인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과거가 석기의 투명한 시선을 따라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세상 속에서 자꾸만 길을 잃어버리는 석기와 시간 속에서 영영 길을 잃어버린 채 멈춰 선 진주. 두 사람은 어긋난 시곗바늘을 되돌리듯 서로의 발자국을 포개며 잃어버린 기억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진주는 과연 자신이 외면해왔던 슬픔과 결핍의 페이지를 제대로 마주하고 침묵의 사전 속에 잃어버렸던 ‘나’라는 단어를 다시 적어넣을 수 있을까?

사춘기가 오기가 무섭게 온갖 규칙을 위반하고 세계를 헤집고 다니는 식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애들한테 어른들이 아주 발라당 까져가지고! 하고 싫은 소리를 했다면, 나는 까지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조금씩 서서히 지워지던 내가 앓던 건 성장통도 존재통도 아닌 부재통이었을지도 몰랐다. (127~128쪽)

상처의 자리 위에 다시 쓰는 단어들
침묵을 건너 비로소 완성되는 자기 호명

《잃기일지》는 언어의 형식과 균열을 서사의 뼈대로 삼는 지적인 소설이다. 진주는 어린 시절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선택적 함묵증을 겪으며 ‘말’을 잃고 침묵을 모국어처럼 체득한 인물이다. 그에게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가림막이다. 진주는 끊임없이 자신을 1인칭이 아닌 ‘진진주’라는 3인칭으로 부르며 고통의 주체로부터 자아를 탈각시킨다. 그와 동시에 소설 전반에 반복되는 “내 사전에 ~은 없다”라는 문장과 단어의 의미를 자유롭게 정의하는 사전 놀이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지켜내려는, 조용하지만 완강한 방어적 선언에 가깝다.

소설은 ‘지금-여기’의 진주와 ‘그때-거기’의 진주를 “시시각각(씨씨깎깎)” 겹쳐놓으며 시간의 선조성을 거부한다. 작가의 말에서 고백하듯,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양안복시”처럼 두 겹으로 포개진다. 필리핀 바기오의 지하 방에서 펄과 주고받았던 교환 사전의 침묵은 현재 시점에서 조카 석기가 보여주는 기벽과 공명한다. 석기는 진주의 유년 시절이 투사된 거울인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는 “잃어버린 것을 더 잘 잃어버리는” 일을 통해, 온전한 소유나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억지로 빈자리를 메우기보다 그 부재 자체를 응시하고 품어 안는다. 검은 잉크로 쓴 문장 뒤에 남겨진 새하얀 깜지의 눌린 자국처럼, 드러나지 않았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침묵의 상흔을 끌어안을 때, 진주는 비로소 오랜 시간 남처럼 대하던 ‘진진주’라는 방어벽을 깨고 나와 “나는 나”라고 스스로를 호명하며 주어의 자리 위에 당당히 바로 선다.

똑똑, 하고 노크하자 굳게 잠긴 문 안쪽에서 딸깍, 하고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건 곧 입국이 허가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내게 허락된 건 한시적인 체류일 뿐, 서로의 시간과 서로의 마음과 서로의 사전에 적힌 단어를 완전히 포개놓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따 오는 것만큼이나 아득한 일이었다. 그 아늑한 아득함 속에서, 우리는 종종 서로의 이름을 포개어놓았다. (134~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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