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진중한 사진과 유쾌한 코멘터리
단독 사진집 『너의 표정』에서 그러했듯, 박찬욱의 사진 세계는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영화가 ‘만드는’ 일이라면 사진은 ‘발견하는’ 일인 셈이다. 어떤 사물들은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평범한 풍경 속에 있다가 특별한 시간과 빛 속에서 불현듯 시선을 사로잡게 된다. 그 사물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의미를, ‘표정’을 얻게 된다. 이렇게 박찬욱의 사진은 문득 번뜩이는 시선으로 채워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그 진지한 번뜩임을 글로 설명할 때는 진중함이 아닌 유머가 가득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게 어색하다고 고백하는 그는 사진을 찍은 순간들을 복기할 때면 즐거운 유머와 재치를 사용한다. 유쾌하면서도 무게감을 잃지 않는 그 문장들은 사진을 보고 읽는 즐거움을 배가한다. 창작자 박찬욱의 팬이라면 세상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그의 사진과 글을 접하면서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하나의 세계
이번 사진집이 출간되면서 영화 <헤어질 결심>을 둘러싼 세계는 더욱 확장되었다. 전례 없는 열풍을 일으켰던 각본에 이어 그 각본을 최초로 시각화한 스토리보드북이 출간되었고, 이후 공식 스틸 사진들을 모아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열한 포토북이 나왔다. 이러한 공식 콘텐츠들이 연이어 출간된 후, 이번에는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사적인 반영을 모은 ‘박찬욱-헤어질 결심-사진집’이 출간되면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마치 영화 블루레이의 코멘터리 서플리먼트처럼, <헤어질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의 내적인 소회를 담고 있는 이 사진집은 한 편의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책 속에서
2018년 여름 런던에서 박해일이 연기하면 딱 좋겠다고 생각한 한국인 형사와 탕웨이 아니면 할 사람 없다고 생각한 중국인 용의자가 만나는 수사/로맨스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팬데믹 기간을 관통하여 그 영화 〈헤어질 결심〉은 2022년 5월 한국의 파주에서 완성되었다. 그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찍은 사진들 중 몇 장을 여기 골랐다. 내 주장에 의하면 모두 제작 현장 사진이다.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 만들까 대개 그 생각만 하던 때였으니 어디를 가나 내게는 현장이었다는 말이다.
전에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사진집 〈아가씨 가까이〉를 낸 적 있다. 이런 책은 말하자면 제작 과정의 기록 자료이자 나 개인의 일기다. 자료면서 일기라면 뭣보다 여행기가 떠오를 텐데 정말 이 책을 그렇게 봐 줘도 좋겠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가지러 가는 여행의 기록으로써의 사진집. 어디 먼 나라로 떠나 때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면서 끝내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풍경을 재빨리 스케치해 두기도 하고 어느 밤에는 시흥이 올라 멋대로 끼적이기도 한 공책을 상상하라. 기차표나 박물관 입장권 따위, 심지어는 단풍 든 이파리 같은 것도 붙여 둔. 그런 식으로 가로 이미지와 세로 이미지가, 흑백과 컬러가, 객관과 주관이, 인물과 풍경이, 산문적인 사진과 시적인 사진이 섞였다.
시간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좌우 페이지의 짝짓기에,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 연달아 나타나는 이미지가 주는 즐거움에 신경을 썼다.
-5페이지
연기는 얼굴로 하는 것이고, 발에는 편한 신이 최고.
1부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는 둘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대화도 없고 장난도 없었다.
파주 산책길. 〈헤어질 결심〉 편집 생각에 골몰해서 고개 숙인 채 미친 사람처럼 속보하다가 문득 눈을 드니 이게 보였다. 멈춰 섰다. 못난 나무들과 한심한 잡초들로 이루어진 대로변 언덕이다. 이 앞을 오백 번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눈 준 적 없는 가련한 지구의 한 귀퉁이다. 그런데 이 계절, 지금 이 순간이 빛을 만나니 이렇게 되는구나.
박정민 분장이 마음에 들어서 찍어놓았다. 양 눈에 하나씩 한자를 문신했다. ‘사람 인(人)’과 ‘두 이(二)’, 합하면―두 사람이 아니라―‘어질 인(仁)’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 한 글자다.
나는 이 표정이 박해일에 대해 많은 걸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 고동/노랑/초록/보라 배색은 언뜻 화려하지만 사실 지극히 우울하고 역겹고 변태적이다. 독버섯 같다. 톡톡한 옷감/사람 살갗/나무/가죽의 다양한 표면 질감이 어우러져, 손 내밀어 만지고 싶게 만든다. 소재끼리의 마찰음이 들리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