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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미술관 :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이 된다 - 아무튼 시리즈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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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번호
312896
ISBN
9791188343898
출판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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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2025-11-10
페이지, 크기, 무게 176쪽, 110*178mm, 123g
목차
첫 만남
일단 미술관으로 돌진하기
기다림의 자세
불편한 예술
공간의 힘, 로스코
뒷모습
스탕달 신드롬
미술관에 가는 여자들은 위험하다
장롱을 여는 일
미술관에 가면 왜 다리가 아플까
화이트 큐브
무제
액자
굿즈
지구에 해로운 미술관?
대안으로서의 미술관
미술관으로 변신한 공간들
조금 더 다정한 미술관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연습
삶의 마지막 페이지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이유리
미술 교과서와 신문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발견하면 오려 모으던 아이였다.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가 런던의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를 원 없이 누볐고, 그 결과 영어 실력 대신 나만의 미술 이야기를 한가득 품고 돌아왔다.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에 미술 칼럼을 연재했으며 여성의 시선으로 본 예술사, 을의 편에 선 예술가 등을 주제로 인문학 강의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글쓰기와 강의를 통해, 그림이 펼쳐 보이는 세계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 싶다. 지은 책으로 『왜 유명한 거야, 이 그림?』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기울어진 미술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이 있다.


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19~20p
그렇게 자주 그림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시야가 트인다. 대부분의 미술관에서는 비슷한 시대의 작품을 모아서 전시한다. 작가는 달라도 주제나 소재가 비슷해 어느 순간 공통의 패턴이 눈에 들어오고, 그림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자연스레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스틸 라이프(Still Life)라는 단어가 ‘정물화’를 뜻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런데 16~17세기 네덜란드·플랑드르 전시관에 가니 해골과 꽃, 촛대가 나오는 작품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그림 속 촛불은 꺼지고, 꽃은 시들고, 과일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내게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비슷한 작품을 줄곧 보다 보니 자연스레 그림들이 내뿜는 허무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야 그것들이 라틴어로 공허, 가치 없음을 뜻하는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를 갖고 있더라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진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네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교훈을 주는 그림 장르가 바로 스틸 라이프, 정물화였다.

38~39p
불편하고도 진실한 예술은 그런 것이다. 비겁한 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편견의 머리채를 잡고 뿌리까지 사정없이 뜯어내는, 바로 그런 존재. 미술관은 그래서 때때로 성찰의 장소가 된다. 예술작품을 보러 들어갔지만, 끝내 나 자신과 맞닥뜨리고 나오는 곳.

51~52p
그러고 보면 미술관과 뮤지엄 같은 공간은 참 묘하다. 이곳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공간이 주는 ‘힘’에 의해 스스로 작품이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뿐이랴. 이 공간에 들어온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미술관 구석에 놓인 의자는 사실 전시 지킴이의 휴식용 의자일 뿐이다. 하지만 왠지 작품 같아서 멀찌감치 서서 봤던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72p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자신 혹은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행위와 다름없다. 혼자 전시를 본 여성들은 눈앞의 작품을 곱씹으며 질문하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을 낳았고, 그 의문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세계상을 키웠다. 이때 여성들의 머릿속에 싹튼 세계상은 가부장제가 강요해온 ‘전통적인 모습’과 단연코 일치하지 않았다. 미술관은 그녀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줬고, 상상력은 여성이 가부장제의 일렬종대에서 벗어나 “문턱 너머 저편”(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표현)으로 날아가는 데에 힘을 보탰다. 문턱 너머 저편엔 무엇이 있을까.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여성 자신조차도.

84p
세 시간 동안 실내에서 걷기만 했을 뿐인데, 왜 국토 종주라도 한 듯 진이 빠지고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걸까. 머리는 멍해져 어느덧 ‘저것은 노랑이요 저것은 빨강인가?’ 수준이 된다. 알고 보니 이 증상에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뮤지엄 레그(Museum Leg)’. 나만의 독특한 문제가 아니라 많은 이가 겪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브르 같은 대형 미술관뿐만 아니라 작은 미술관을 돌아본 뒤에도 우리는 종종 ‘뮤지엄 레그’에 시달린다. 도대체 왜 그럴까?

107p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그림만큼이나 자주 마주치는 것이 바로 액자다. 그림을 돋보이게 해주는 조연이 지만, 때로는 이 액자 자체가 눈길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어느 날 문득 그림과 한 몸처럼 붙어 있는 액자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액자는 내게 ‘닻’이자 ‘돛’이면서 ‘덫’이로구나.’

118~119p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미술관 관람의 진정한 핵심은 예술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들이 사랑했던 것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그 예술가가 좋아했을 법한 물건, 그의 작품세계와 통하는 물건(굿즈!)을 손에 넣는 데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길어 올린 교훈들, 즉 아름다움의 의미, 정신의 확장 같은 것들은 미술관을 나오는 순간, 대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기념품은 미술관에서 느꼈던 감동을 오랫동안 우리 마음속에 머물게 하고, 일상과 부드럽게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기념품 숍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을 보급하고 이해시키는 전초기지라 할 수 있다.

135~136p
그렇다. 이것이 바로 미술관의 태생적 한계다. ‘이제 막 터져 나온 저항정신’도 미술관 문턱을 넘는 순간, 그 본래의 날카로움을 잃기 십상이다. 미술관은 작품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제도적 틀이기에 그곳에서 공인된 예술은 관람객과 편안하게 만난다. 하지만 그만큼 도발적 메시지가 중화될 위험도 크다. 때로는 예술가들이 미술관과 손을 잡는 것이 ‘파우스트적 거래’처럼 보일 때도 있다. 미술관의 권위 속에서 작가의 불온한 목소리가 약화되거나 중립적인 시각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뾰족했던 〈올랭피아〉도 오르세에 입성하자 완전히 무장해제되었고, 뱅크시의 날카로운 조롱 역시 미술관이라는 ‘청정지대’에 들어서는 순간 체제가 부여한 권위에 흡수되었듯이 말이다. 오죽하면 ‘미술관이 예술가를 사랑하는 방식은 박제사가 사슴을 사랑하는 방식과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났을까.

145~146p
어쩌면 누구나 자기만의 미술관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유년 시절의 꿈, 첫 실패의 기억, 사랑과 상실의 흔적까지 그 모든 삶의 파편이 차곡차곡 전시되어 있는 내면의 공간. 때론 먼지만 쌓인 채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그 방을 우리는 스스로 들여다보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어떤 계기만 생긴다면, 그 방은 다시 열릴 수 있다.

149p
미술관과 박물관에 갈 때마다 의도치 않게 나 자신의 무식함(?)을 새삼 확인하곤 한다. 전시된 작품의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자괴감이 덮친다. 예를 들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170호 백자청화 매조죽문유개호(白磁 靑畵梅鳥竹文 有蓋壺)를 보자. 분명히 한글로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아리송할 뿐이다.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도 헷갈린다. 한자를 기계적으로 한글로만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내 당혹감은 병기되어 있는 영어 제목을 보고서야 풀렸다. White Porcelain Lidded Jar with Plum, Bird and Bamboo Design in Underglaze Cobalt Blue. ‘아, 코발트블루 빛깔의 매화·새·대나무 그림이 그려진, 뚜껑 달린 백자 항아리구나!’ 영어 제목이 더 쉽고 명쾌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인데.

167p
미술관에는 이미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뒤표지까지 닫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건 대개 그들의 생애 말기에 그려진 소수의 작품만이 아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순간에 작가가 남긴 수많은 흔적도 함께 전시된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어떤 미래가 닥칠지 모르는 채 붓을 쥐고 있는 순진무구한 눈빛의 그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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