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산북스에서는 ‘이 시대의 낭만성’이라는 주제 아래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애가』, 『표류도』를 새로운 표지로 재구성한 〈박경리 큐레이션 리커버〉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이는 『토지』로 대표되는 거대한 서사 너머 또 다른 박경리 문학의 얼굴을 조명하고 ‘현재진행형의 문학’으로 다시 읽기 위한 시도다.
1950년대, 여성 독자의 등장과 함께 연애소설이 범람하던 시기, 박경리는 전형적인 연애 서사를 벗어난 소설로 자신만의 문학적 위치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사랑을 선택하지만 그에 종속되지 않으며, 결혼이라는 결과보다 스스로의 욕망을 끝까지 지키는 과정을 중시한다. 사랑이 무용함을 알면서도 사랑을 갈망하고, 삶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살아가려는 이 낯선 낭만성은 박경리 문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는 불확실성과 선택의 책임 속에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를 비추며, 강렬한 여성 인물들을 통해 사랑과 삶, 선택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목차
표류도
작품 해설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박경리
본명은 박금이(朴今伊).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 이후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4~1965) 등 사회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시각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26년 만인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토지』는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전을 그리는 한국 문학의 걸작으로, 이 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우뚝 섰다. 2003년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며 미완으로 남았다. 그 밖에 『Q씨에게』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생명의 아픔』 『일본산고』 등과 시집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이 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해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운영하며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았다.
2008년 5월 5일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수상 : 1958년 현대문학상
『표류도』는 독자들에게 꾸준히 거론되는 박경리의 또 다른 걸작이다. 1959년 제3회 내성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당대의 호평을 받았고, 박경리의 대표적 연애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 1959년 11월 20일에 발간된 『표류도』는 초판본에 이봉상 화백이 표지화와 면지화로, 천경자 화백이 권두화로 참여했고, 박재삼 시인이 교정·교열 작업을 진행하는 등 무척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었다. 이는 등단한 지 5년이 채 되지 않는 신인 작가 박경리와 그의 첫 창작집 『표류도』에 대한 문단의 관심과 기대가 얼마만큼 큰 것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박경리는 여러 연애소설을 써내면서 사회의 통상적 윤리나 규범에 무관심해 보이면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윤리와 기준을 지닌 주체적 인물을 그려냈다. 특히 『표류도』에서는 분명한 저항의 논리를 품은 인물이 강인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외부의 폭력에 맞서는 과정을 그렸다.
“당신의 정절보다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
외부의 폭력에 대응하는 강인한 생명력
현실의 고난과 싸우는 박경리 여성상의 근원
주인공 현회는 수많은 인물들의 지지와 갈등 속에서 표류하듯 삶을 이어간다. 한국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이후 신문사 논설위원이자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인 상현과 사랑에 빠진다. 상현은 그녀의 직업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애정과 책임감으로 관계를 이어가며 결혼을 원한다. 그러나 현회는 스스로 돈을 벌어 삶을 꾸려가는 주체로서, 사랑은 지속하지만 그 외의 생활에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 유부남이라는 조건과 서로 다른 성장 배경 또한 이 관계의 걸림돌이 된다. 결국 상현은 사랑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삶을 함께 짊어질 상대가 되지는 못하며, 이들의 관계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현회는 특별한 귀책 사유 없이도 주변인들에게 끊임없이 비난받는데, 이는 가부장적 전통이 여전히 견고한 1950년대에 사생아를 낳은 전쟁미망인이자, 생계를 위해 다방의 마담으로 살아가는 젊고 아름다운, 재능 있는 여성이라는 그의 조건 때문이다. 주부인 계인과 순재, 그리고 동창들은 도덕과 규범을 내세워 현회의 직업과 처지를 비난하지만 정작 그들은 음지에서 고리대금이나 부동산 투기와 같은 사회적 악행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손가락질받는 현회는 얼굴이 아닌 자신의 노동으로 삶을 지탱한다. 홀로 된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 유복자인 딸은 물론 종업원 광희와 먼 친척 상주댁 부부까지 돌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낸다. 집안의 몰락과 사랑하는 이와 자식의 죽음,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상처를 겪고도 그는 절망하거나 물러서지 않으며, 비굴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적응하며 생명을 지탱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하는 현회의 태도는 외부의 폭력에 맞서는 그의 확고한 저항 논리라 할 수 있다.
나는 강인한 채찍으로 내 마음을 후려쳤다. 나를 현실에 적응시켜야 한다. 내 생명이 있기 위하여 나를 변혁시켜야 한다. 겨울이 와 산야에 흰 눈이 덮이게 되면 털이 하얗게 변하고, 여름이 와서 숲이 우거지면 나무껍질처럼 털이 다갈색으로 변하는 토끼라는 짐승의 생리를 나는 닮아가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얼마나 유구한 세월을 두고 인간과 자연 속에서 그 끈질긴 싸움을 해왔던가. 끊임없이 자기를 변혁하고 현실에 적응해가며 생명을 지탱해오지 않았던가. (332~333쪽)
절망에 빠진 듯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강인하고도 인간적인 현회의 존재는 사랑과 자아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생생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의 행적과 선택은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의 소용돌이 우리 소설이 지닌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며, 인간을 보다 입체적이고 폭넓게 바라보게 만든다.
시간을 견뎌온 작품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으로 돌아온다
세 편의 소설로 읽는 새로운 낭만에 대하여
여성 독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연애소설이 범람하던 1950년대, 박경리는 기존 연애 서사가 보여주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작품을 씀으로써 자신만의 위치를 확립한다.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사랑을 선택하지만 사랑에 종속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끝까지 묻는 과정이었다. 사회적 부조리에 타협할 수 없는 의지와, 가정이나 결혼으로 타협하지 않는 사랑에 관한 깊은 탐구가 이 시기 박경리의 연애 서사에 이미 꿈틀대고 있었다. 사랑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을 바라고, 삶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살아가려 하는 것. 결국 모든 선택이 자신의 몫임을 받아들이는 이 낯선 낭만의 세계는 박경리 문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 되었다.
이러한 박경리의 낭만성은 불확실성과 선택의 책임 속에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를 비춘다.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강렬한 여성 인물들은 사랑과 삶, 선택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에게 질문해온다. 박경리의 문장은 오래되었지만, 그 질문은 한 번도 낡은 적이 없다. 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끝내 살아가려 하는가. 박경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질문을 시작했다. 이제 그 질문을 다시 이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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