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재
아침
춤
기다림
선택
두 마리의 늑대
키 작은 남자
고독
누가 살아온 걸까
나는 언제 시작되는가
선과 악
용서
보는 자 없는 시선
아는 것
살아 있다는 건
인드라망
동탄
깨달음
사유
틈
애도
잠깐 왔다 간 빛
자유의지
소풍
무아
마음 하나
흔들리는 것들
‘나’라는 이름의 그림자
잠그는 일
김 씨
질투
현존
믿음
신비체험
침묵
퀘렌시아
이미, 퀘렌시아
춤판
저자소개
저자 : 온
어떤 질문은 대답으로 닿지 않았고, 어떤 고통은 설명으로 풀리지 않았다. 말은 문턱에서 멈췄고, 생각은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모른 채 살아가기에 삶은 너무 가까웠다. 외면하려 할수록 오래된 질문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답을 찾다 멈춰 선 곳에서, 붙잡히지 않는 어떤 자리를 마주했다. 이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미, 퀘렌시아』는 그 자리에서 비롯된 소설이다.
이 글로 다 담지 못한 것들은 또 다른 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 블로그 sbseol3
출판사 서평
고통의 바깥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 발견한 가장 가까운 안식처
상실과 고독을 지나 ‘이미 완전한 나’에게 돌아가는 마음의 여정
삶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해졌을 때,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까. 『이미, 퀘렌시아』는 딸을 잃고 초로기 치매를 앓는 아내마저 요양원에 맡긴 뒤 삶의 끝에 선 연우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살아남은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리산 자락의 고택 ‘청연재’로 떠난다. “본래 청정하니 스스로 그러한 집”이라는 뜻을 지닌 청연재에서 연우는 현묘와 현덕, 그리고 저마다의 상처와 질문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극적인 사건을 통해 단번에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니다. 밥을 먹고, 콩을 까고, 나물을 다듬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서서히 달라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 느린 변화 끝에서 연우는 안식처란 찾아가야 할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안에 존재했던 자리임을 깨닫는다.
상실을 지우지 않고 다시 살아가는 법
연우의 고통은 단순한 우울이나 막연한 공허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가난과 폭력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성공을 향해 자신을 몰아붙였던 시간, 딸 별이의 죽음, 아내를 향한 원망과 죄책감이 겹겹이 쌓여 있다. 특히 별이가 탄 유모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가던 순간과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내의 모습은 연우를 과거에 붙들어 둔다. 그는 아내를 미워하면서도 그녀의 묵주를 버리지 못하고, 딸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아이를 찾아 헤맨다. 이처럼 작품은 상실을 쉽게 극복하거나 아름답게 승화시키지 않는다. 고통은 실제로 아프며, 그것을 환영이나 생각이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연우의 저항을 충분히 보여 준다.
청연재의 현묘 역시 연우에게 성급한 위로나 정답을 건네지 않는다. 그는 용서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감정을 통제하거나 억누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분노가 올라오면 분노하고, 슬픔이 오면 울되, 그 감정 위에 또 다른 이야기를 쌓아 영원한 성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이 말하는 치유의 핵심이다. 치유란 고통스러운 기억을 삭제하거나, 상처받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나간 사건을 현재의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떠오르는 감정이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이다. 연우는 현묘의 밥상과 현덕의 춤, 순돌이와 고양이, 바람과 햇살 속에서 자신이 여전히 먹고 웃고 숨 쉬는 사람임을 조금씩 회복한다. 거창한 깨달음보다 따뜻한 보리빵 한 조각과 된장 죽 한 그릇이 먼저 그의 몸을 살린다. 『이미, 퀘렌시아』는 바로 이 구체적인 일상의 온도를 통해, 삶은 이해하거나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참여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세계
이 작품은 상실을 다룬 치유소설인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철학소설이다. 청연재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민은 열등감, 용서, 선과 악, 고독, 믿음, 자유의지처럼 서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 모든 질문은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모인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 기억을 곧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과 세계를 나눈다. 옳음이 생기면 그름이 생기고, 우월함을 세우면 열등함이 나타나며, 용서하는 나와 용서받아야 할 타인이 분리된다. 현묘는 이러한 분별이 고통의 뿌리라고 말한다.
작품은 불교의 무아와 연기, 인드라망, 현존의 개념을 중심에 놓으면서도 특정 종교의 교리를 일방적으로 설파하지 않는다. 기독교와 동양철학, 영적 체험과 현대적 사유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언어가 가리키는 공통의 자리를 탐색한다. 모든 존재가 인드라망의 보석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다면, 홀로 떨어진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몸과 생각, 감정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것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자리는 언제나 그대로다. 연우가 찾아 헤매던 진정한 자아는 설명하거나 붙잡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이것’에 가깝다.
그러나 소설은 깨달음을 현실도피나 초월적 능력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도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울며, 몸이 아프면 통증을 느낀다. 달라지는 것은 삶의 파도가 아니라 파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식이다. 현덕의 춤은 이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그는 세상의 평가와 정해진 형식에서 벗어나 몸이 움직이는 대로 춤춘다. 작품의 마지막 ‘춤판’은 고통이 완전히 끝난 사람들의 축제가 아니라, 기쁨과 슬픔, 상실과 만남을 모두 삶의 움직임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들의 춤이다. 삶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느슨해질 때 인간은 비로소 세계와 함께 흔들릴 수 있다.
‘퀘렌시아’는 투우장에서 상처 입은 소가 공격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안전한 장소를 뜻한다. 연우와 표량은 오랫동안 그곳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청연재와 현묘, 깨달음과 공부가 자신을 고통에서 구해 줄 피난처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작품이 끝내 건네는 답은 제목 속 ‘이미’에 있다. 우리는 퀘렌시아에 도착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서 삶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다. 고통은 일어났다가 가라앉고, 생각과 감정도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그것을 품는 바다는 훼손되지 않는다. 『이미, 퀘렌시아』는 아픈 사람에게 고통이 허상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고통이 삶의 전부는 아니며, 상처 입은 채로도 숨을 고르고 다시 춤출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작품은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던 평화를 뒤늦게 알아보는 이야기다.
책 속에서
차로 몇 분 더 들어가자, 낮은 산을 끼고 대나무밭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푸른 기와집이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서자, 처마 밑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울렸고, 그 소리는 고요를 한 겹 더 깊게 만들었다. 입구의 나무 푯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청연재(靑然齋), 본래 청정하니 스스로 그러한 집.
---p.9
현실은 생각이 만든 모양이라고 하던 현덕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모양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는 일일까.
---p.20
“보석은 제빛을 품고 있어도 마주한 빛이 있어야 드러나잖아요.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 서로를 비추기 위해서 아닐까요.”
---p.128
타인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만큼만 보일 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남과 싸운 적이 없다.
……늘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p.237
“투우장 한쪽, 정확히 정해진 장소는 아니지만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곳을 ‘퀘렌시아’라고 부른대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싸우다 가 지친 소는 그곳으로 가서 기운을 되찾기 위해 휴식을 하 는 거죠. 힘들고 지쳤을 때 쉬어 가는 곳. 칼이 등에 박혀 피가 흘러도 그곳에서는 안심하는 거죠. 거기 있으면 소는 두려워하거나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p.327
연우는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지만 이 고요는 떠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잃고 무너져도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었다. 투우장 한가운데 치열하게 피 흘리던 모든 기억조차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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