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송금은 했을까
두더지 게임
서울의 원시인
얼룩의 기억
스마트폰
잠시 보류
크레센도
위로
나 살아 있어요
미역국에 관한 소고
첫 거짓말
같이 걸을까요
습관이었다고 한다
리부팅
우리는 왜 언제부터였을까
2부
사이
505 사진전
귀신고래 보고서
야간 운전
어떤 오후
뿌리를 내리다
곶자왈에서
콩국수
다시, 금남로에서
저녁 6시
모두의 풍경
그녀의 구두
미국 능소화
마트료시카
체스 판을 떠날 수 없다
3부
좋은 날
봄꽃이 질 때
마인드 피싱
산벚꽃 아래에서
말복
내 마음의 노끈
칡넝쿨의 독백
사라져 가는 것들
윤판나물 필 때
태산목
서서평길에서
유리창 안으로 파고든
교동법주를 샀다
허공을 담다
로또는 오지 않는다
4부
세작을 꺼내 끓였다
치자꽃에 관한 기억
아버지가 된다
낙월도, 먼 섬의 기억
아버지와 수국
덕분에
학1동 938번지
엄마는 당연직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차꽃 서설
늦은 별곡
수하물을 보내고
감기약을 입안에 넣듯
홀로 웨딩
되돌아온 그녀
옷장을 정리하며
해설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원형질 속의 기억들
-정윤천(시인)
저자소개
저자 : 장숙희
광주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 국어 교사로 지냈다. 2002년 《시인정신》에 「목백일홍 필 무렵」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풀리지 않는 숙제』, 동인지 《별숲》 《원추리》 등을 냈다. 2019년 국제PEN광주문학상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출판사 서평
내 삶에 시가 처음 다가온 순간은 지금도 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께서 미처 못 이룬 꿈을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나오지 못한 당신의 습작 시집과 공부를 다 못 마친 학생증! 그 미련과 애환이 내게 뿌리를 내린 이후 화두처럼, 숙제처럼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끝내 시를 붙잡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변명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낱 푸념에 불과할지라도 아버지를 기리는 나의 방식이기에 시를 쓰는 순간순간은 삶이 충만해집니다.
무등산이 보이는 광주문학관 창작실에서
2026년 8월
장숙희
책 속으로
피난하듯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너 없는 가상의 세계를 한없이 돌다 와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헤죽거리며
고개를 내미는 너
보고 싶다
보고 싶지 않다
그립다
그리울 리 없다
안으로 안으로 밀어 넣어도 끝까지 살아남는
적막함이 허공에 가득하다
게임이 끝나도 끝까지 살아남는 너를
한 번 더 돌아보며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리워하기로 한다
---「두더지 게임」 중에서
저 배롱나무를 좀 봐
얼마나 울었는지 몸이 매끄러워
시월의 강가에는
말라 버린 단풍잎들이 매달려 있었고
태풍이 지난 자리에서
어찌할 바 몰랐던 나무들이
혼란 속에서 뒤틀려 있기도 하였다
너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네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줄어져 가는 사탕을 입안에서 굴렸다
저녁에는 슬픔도 녹아 없어지겠지
---「사라져 가는 것들」 중에서
겹쳐진 옷자락 사이에서
구겨져 있는 시간을 봅니다
언젠가는 안아 주고 싶었던 오늘이
또아리를 튼 채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표정입니다
그 곁에 소리 없는 형상의 당신
당신의 눈길도 느낄 여유가 없던 마음에
잊혔던 미소가 피어납니다
명품만 고르려 했던 순간마다
당신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군요
한 칸 한 칸 비울 때마다
숨어 있던 바닷길이 생겨납니다
---「옷장을 정리하며」 중에서
추천평
장숙희의 시는 시인의 성품이 그러하듯 단아하고 조용하다. 직설적 화법 대신 말을 줄이거나 에두르는 방식으로 마음과 생각을 전한다. “때로는 말을 아끼는 것이//서로의 상처를 달래는 방법”(「미역국에 관한 소고」)이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주고 버텨 주고 귀 기울여 주는 시집이다. 그래서 말갛게 우려낸 찻물처럼 너무 차갑거나 뜨겁지 않고 적절한 온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중용의 태도가 대체로 미덕으로 작용하지만,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한계가 될 수 있음을 시인 또한 알고 있는 듯하다. 온갖 뒤척임 속에서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리워하기로 한다”(「두더지 게임」)고 스스로 다독이는 것은 단순한 유보가 아니라 그리움의 지속을 위한 절제의 기술이다.
그리움의 끈을 따라가 보면 시인의 마음의 고향인 낙월도에서의 유년과 학1동 938번지의 추억을 만나게 되고, 가족과 친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돌올하게 만져진다. “아직 사위지 못한 기억들이/그날을 인화해 주”(「505 사진전」)는 광주의 오월이 있고, “분노를 어금니에 물고서 늦게나마 금남로로”(「다시, 금남로에서」) 나서기도 한다. 「저녁 6시」와도 같은 황혼 무렵 펴내는 시집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진폭이 넓은 편이다. 저녁 6시는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를 거두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기 좋은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인 동시에 “남아 있는 시간의 불을 밝히”는 시간이다. 모쪼록 시집 출간을 계기로 시의 등불을 더환하게 켜고 새로운 시간을 일구어 가시길 기원한다.
- 나희덕 (시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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