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나리아∀
주간 고속도로
건강병
눈사태가 일어날 때
플라나리아?
몰입형 어쩌고저쩌고 성장 체험 캠프
지금이 바로 그날
플라나리아?
라스베이거스
저자의 말│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여생뿐이다
역자의 말│추락하는 탄도 밖에서 건네는 위로
해설│고기 분쇄기로 살아가는 미덕에 대하여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데라오 데쓰야
1988년생, 본명은 차오성하오曹盛濠. 타이완 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구글 엔지니어로 8년간 일하며 마운틴뷰, 타이베이, 도쿄에서 근무했다. 2019년 〈주간 고속도로〉로 제15회 린룽싼 문학상을 받았고, 주거九歌 출판사의 ‘올해의 소설’에 2년 연속 선정된 바 있다. 2023년에는 타이완 문학상 금전상과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역자 : 김소희
‘차라’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14년 차 번역가. 시나리오 번역으로 입문해 다수의 한중 합작 드라마와 영화 대본을 번역하고 중국어 관련 도서를 여러 권 썼다. 현재는 바른번역 소속으로 출판 번역과 시나리오 번역을 겸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중국어 번역가로 산다는 것》, 《마음의 문장들》, 《네이티브는 쉬운 중국어로 말한다》, 《중국어 명대사 필사집》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상견니 영화 각본》, 전면 개정판 소설 《상견니》, 《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 《유심인》 등이 있다.
출판사 서평
“질주하듯 써 내려가 자본주의의 썩어빠진 심장을 정조준하는 작품. 대담하고도 거침없는 이야기 속에서 억눌러온 자기혐오와 죄책감, 엇나간 욕망과 폭발한다.”
-아넬리즈 첸(《CLAM DOWN》, 《SO MANY OLYMPIC EXERTIONS》의 저자)
“인간의 가장 금기시된 욕망과 가장 관습적인 성공의 기준을 한데 엮어내며 끊임없이 예상을 뒤엎는 작품.”
-린 킹(2024년 전미도서상 수상자)
“이 책은 세계화된 21세기의 삶을 향해 보내는 잔혹한 시다.”
-미셸 쿠오(《READING WITH PATRICK》의 저자)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성공적인 삶과 자유로운 시대 이면에 자리한 고통
《탄흔》은 타이완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아시아의 작은 섬 타이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더 넓은 세계와 가능성을 찾아 “어둑하고 빛줄기 하나 없는 광야 사이에 오직 인류만의 전유물인 가늘고 긴 탯줄이 빛을 내며 허공으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대륙 미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민자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은 또 다른 경계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그들을 둘러싼다.
타이완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구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작가 데라오 데쓰야는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소설 속에 끌어들이며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허무와 좌절,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공허를 보여준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 제헝, 자신만은 진짜인지 궁금해하는 밍헝, 조각난 자신을 내던지고야 만 샤오화, 현실에 순응하면 살아가기로 선택한 신닝, 그리고 다른 이를 지배하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었던 우이샹까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을 규정하는 환경과 관계 속에서 흔들린다. 그들의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가 공유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명쾌한 해답보다는 애써 외면해 온 자신과 마주할 때 찾아오는 해방감일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진짜인 거야?”
욕망과 치욕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
소설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진짜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가, 지금의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인가. 자신은 특별하다는 믿음과 평범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그들은 수없이 흔들린다. 그러나 “별이 무슨 쓰레기처럼 잔뜩 널려 있네”라는 문장이 암시하듯, 자신들 역시 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존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잔인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제헝 역시 예외는 아니다. 거대한 시스템 밖으로 탈출하고자 한 그의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누군가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고통으로 새겨진다.
데라오 데쓰야는 이들의 삶을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거침없는 욕망과 치욕, 비뚤어진 애정과 성적 욕구까지 숨김없이 눈앞에 펼쳐 보인다. 처음에는 낯설고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인물들의 행동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조금씩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인물들의 서사가 어느 순간 삶의 이야기가 되고, 동의할 수 없었던 인물들의 감정이 어느 순간 하나의 감각이 된다. 데라오 데쓰야가 그려내는 세계는 허무하지만 끈질기고, 처절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정하다. 그는 섬세한 손가락으로 상처를 두드리듯, 우리가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을 건드려 고통에 공감하게 한다.
“고통의, 고통의, 고통을 맛보게 해줄게”
서로 엇갈리면서 연결되는 단편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
《탄흔》에는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헝을 화자로 삼아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 <플라나리아> 연작을 비롯해, 린룽싼 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남겨진 이들의 외로움을 그린 <주간 고속도로>, 엘리트 대학생들의 좌절과 실패를 다룬 <건강병>, 어린 바둑기사의 천재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후회와 집착을 그린 <눈사태가 일어날 때>,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서 복잡한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몰입형 어쩌고저쩌고 성장 체험 캠프>, 그리고 얽히고설킨 인물과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내며 소설집을 마무리하는 <라스베이거스>까지. 하나의 단편에서 스쳐 지나간 인물이 다른 단편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며, 독자는 각자의 입장에서 전혀 다른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인물들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각각의 단편을 하나의 세계로 엮어낸다.
《탄흔》은 세상이 정한 시스템을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그 바깥을 꿈꾸며 고통스러운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성공과 실패, 욕망과 치욕, 순응과 저항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의 삶을 끝까지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아홉 편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들의 욕망과 고통은 오래도록 독자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그날 밤, 나는 길고 긴 꿈을 꾸었다. 꿈속은 무척이나 밝았다. 마치 역광 때문에 과노출로 찍힌 사진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다란 복도 위로 나무 그림자가 일렁거렸고, 주변 가득 하얀빛이 모든 공간을 채우고도 계속해서 부풀어 올랐다. 우이샹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도시락에서 따뜻한 김이 솟구치며 피어올랐다. 햇빛, 지나치게 눈부신 햇빛이 끊임없이 분열과 증식을 반복하고 있었다.
_ p.22~23
주간 고속도로 제5호선은 곧게 쭉 뻗어 있었다. 정속 주행 기능을 켜두면 핸들을 거의 건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어둑하고 빛줄기 하나 없는 광야 사이에 오직 인류만의 전유물인 가늘고 긴 탯줄이 빛을 내며 허공으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일 터였다. 이제 막 밤이 되어 하늘 대부분이 어둑한 와중에 오직 지평선의 작은 틈새 사이로 어두운 보랏빛의 빛무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_ p.56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말했다.
“난 그저 복수하고 싶을 뿐이야.”
_ p.109
“아주 오래전 일일지언정 나는 그게 환상에서 비롯된 가짜 기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어렸을 때는 의형이 열성을 다해 내게 바둑을 가르치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때 의형은 맹기 연습을 반복적으로 시켰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녹음기에 대고 목소리로 한 수 한 수 대국을 두었다. 처음에 나는 중반도 못 가서 어디에 돌이 있고 어디가 비었는지 헷갈리기 일쑤였다.
“왜 안 되지? 왜 안 되는 거야?”
_ p.127
내 손끝에 총기 홀스터의 가죽 감촉이 느껴지던 그 순간, 신닝이 내 손을 짓눌렀다. 조금의 인기척도 없이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있었다. 신닝은 내게 몸을 바짝 밀착하면서 팔로 내 오른쪽을 감싼 뒤, 트렁크 속 백팩 안에 있던 내 손목을 꽉 짓눌렀다. 신닝의 뜨거운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고, 손가락이 내 살 속을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신닝의 손은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마치 캘리포니아 하늘에 매일 드높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_ p.212
나는 언젠가 청소년이 된 이 가냘픈 몸이 그 유명한 기찻길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기차가 점점 다가올 때의 진동과 열기, 그리고 거대한 소리에 소년은 두려워 벌벌 떨 것이다. 더 이상 누군가의 등 뒤로 숨을 수 없을 것이고, 극한의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기차를 그대로 맞이하다 결국에는 그 아래에 짓눌려 고깃덩어리로 조각나고 말겠지.
_ p.243
두 눈을 감고 있는 그 어둠 속에서도 나는 눈앞의 광경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막 한가운데에 놓인 도시, 온갖 허황된 인공물이 만들어 낸 황홀경의 한복판에서 오만가지 색채의 조명이 비추고 있다. 눈 깜짝하면 사라져 버릴, 애초에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었을 이 액체에 찰나의 형체를 선사하면서.
_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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