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용준
2009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굿나잇, 오블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작품으로 『바벨』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프롬 토니오』 『가나』 『세계의 호수』 『유령』 등의 소설이 있다. 「선릉 산책」으로 황순원문학상과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로 소나기마을문학상을, 「사라지는 것들」로 문지문학상을, 『프롬 토니오』로 한무숙문학상을 받았다.
출판사 서평
■ 세기말에 우리는
“1999년 10월의 마지막날. 늦은 오후 왕십리는 황량했다. 이슬비가 내렸고 사람들은 옷깃을 세운 채 움츠리고 걸었다.” 소설 속 어느 하루의 풍경이지만 세기말에 우리 사회는 정말 이슬비 내리는 늦은 오후 어느 황량한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밀레니엄 버그가 발생해 엘리베이터가 멈출 거라고 했고 인터넷이 멈춰 전산이 마비될 거라고 했으며 은행이 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비행기가 추락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종말이 올 거라 믿는 사람도 있었다. 다가오는 2000년을 앞두고 갖은 예언들로 들떠 있던 그때, 어떤 자리는 IMF가 할퀴고 간 폐허 위에 흉터를 드러내고 있었고 사람들은 말을 잃은 듯 침묵하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세상이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도,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사회도 모두 실어증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IMF 키즈’로서 정용준 작가가 그리는 세기말의 풍경이다.
■ 외로운 열네 살 인생
‘나’는 1급 말더듬이다. “넌 왜 사냐? 쓸모없고 말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늘 괴롭힘만 당하잖아. 왜 살아?” ‘나’에게는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 말고도 골치 아픈 일투성이다. 학교에서 외톨이인 건 둘째 치고 국어 선생이라는 자가 걸핏하면 일어나서 책을 읽으라고 시켜 대는데 ‘나’는 그 일방적인 행위에 석연치 않은 저의가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진짜 적은 가까이에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엄마다. 엄마는 ‘나’와 달리 잘해 주는 사람과 금방 사랑에 빠져 버리는 바람에 상처도 많이 받는다.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엄마는 집에 오면 술을 마신다. 엄마의 상냥한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나’는 114로 전화한다. 전화 안내원으로 일하는 엄마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전 애인과 다시 만나는 중인데, 심지어 그 애인과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걸핏하면 ‘나’를 무시하는 그 애인이라는 작자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 언어 교정원에서 만난 세계
“고장 난 사람들만 모아 둔 창고 같은 곳일까?” 엄마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찾은 언어 교정원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곳 같다. 온 동네 이상한 사람은 다 모여 있는 것 같다가도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 이내 쓰러질 것 같은 할머니, 얼굴이 빨간 남자 어른, 인상이 차가운 여자 어른,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과 항상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왜소한 남학생, 허공에 타자를 치듯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불안하게 앉아 있는 청년, 까만 뿔테 안경 너머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더벅머리 아저씨. 그러나 이런저런 교정원을 전전한 나에게 이번만큼은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말하기 연습, 자기 이야기하기 연습, 이름 바꾸기, 자신감 갖기 연습…… 연습을 거듭하는 사이 달라지는 건 말하기 기술만은 아니다.
■ 가까스로 말하기, 마침내 글쓰기
사람들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언어가 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말하기를 어려워하던 한 소년이 말하기의 어려움을 기술적으로 극복하는 데에서 나아가 진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한편의 성장 소설이자 문학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봤던 아름다운 우정과 시에 대한 비유들이 소설의 모습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낙서는 일기가 되고 일기는 소설이 된다. 눈물이 쏟아지려 하면 사탕을 입에 넣던 소년은 이제 눈물에 섞인 감정을 노트 위에 쏟아 낸다. 노트위에 쏟아 내고 나면 눈물은 이야기가 된다. 수많은 밤과 낮을 건너 완성된 이야기가 이제 당신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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