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대프니 듀 모리에 Daphne du Maurier
‘서스펜스의 여왕’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칭송받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스릴러의 제왕인 히치콕의 영원한 뮤즈로도 추앙받고 있다. 저명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문화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자란 대프니 듀 모리에는 십 대 때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에 몰두했으며 이십 대 초반에 첫 장편소설 『사랑하는 영혼』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후 미국서점협회가 수여하는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레베카』를 비롯해 『자메이카 여인숙』『나의 사촌 레이첼』 『프렌치맨 크릭』 『헝그리 힐』 등 듀 모리에 특유의 이야기와 서스펜스가 결합된 걸작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69년에 문학적 공헌을 인정받아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 작위를 받았고 1977년에는 미국미스터리작가협회로부터 그랜드 마스터상을 받았다. 1989년, 81세를 일기로 그녀의 수많은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콘월의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
역자 : 이상원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학부대학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아버지와 아들』『유린되고 타버린 모든 것』 『레베카』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이반 일리치의 죽음』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저서로는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나를 일으키는 글쓰기』 등이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20세기 중반 이후 만개한 대중문화와 현대적인 상상력의 정초를 닦은 작가로 평가받는다. 서스펜스의 여왕이자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원한 뮤즈’로 불리는 그의 작품들은 50차례 이상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며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입증해왔다.
그는 불길하고 무시무시한 상상력을 아무런 제약 없이 펼쳐 보이되, 그 출발점은 언제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새 떼의 공격,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의 균열, 수술 후 뒤바뀌어버린 현상,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유령이나 악령처럼 노골적인 공포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이야기가 섬뜩한 이유는 그 재난이 우리가 믿어왔던 현실과 질서를 서서히 잠식하기 때문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은 놀람과 공포에 기대는 스릴러에 머무르지 않는다. 단순히 자극적인 상황 설정이 아니라, 치밀하게 구축된 내러티브와 인간 심리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시작된다. 위기 앞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붙들며,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러한 심리적 사실주의 위에서 대프니 듀 모리에는 서스펜스의 귀재이자 일급 스토리텔러로서, 현대적 상상력을 깊이 있게 구현하는 진지한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이 세 편의 무자비한, 인물과 일상을 가차 없이 시험하는 서스펜스는 단편이라는 형식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동한다. 에드거 앨런 포는 문학작품은 독자가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문학 단편선 미니미’가 언제 어디서든 쉽게 펼쳐 읽을 수 있는, 세계문학의 결정적 장면이 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책 속에서
새였다. 무슨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람을 피해 날아온 것이 분명했다.
_14쪽, 「새」중에서
새들을 구덩이에 쏟아 넣을 작정이었지만, 자루를 열자마자 죽은 새의 얼어붙은 몸뚱이들이 일제히 바람에 날려 위로 솟구치더니 해안 곳곳에 흩어져 떨어졌다. 고약한 장면이었다. 냇은 기분이 나빠졌다. 죽은 새들이 바람에 날려 자기 손에서 벗어나다니.
_27~28쪽, 「새」중에서
“오늘 오전 11시 내무부 발표문입니다. 전국 곳곳의 도시, 농촌, 교외 지역에서 새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도로를 막고 기물을 파손하며 인명까지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매시간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영국 상공을 뒤덮은 북극기류가 새 떼의 대규모 이동을 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굶주림 때문에 새들이 인명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창문, 출입문, 굴뚝을 단속해주시고 자녀들의 안전에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추후 다시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_29~30쪽, 「새」중에서
언덕 뒤에서 무언가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작은 얼룩 같았지만 점점 커지더니 구름이 되었고, 그 큰 구름은 동서남북으로 갈라졌다. 구름이 아니었다. 새 떼였다.
_37쪽, 「새」중에서
밖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기세등등하게 몰아쳤다. 그는 문밖 계단에서 발길질을 해야 했다. 새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이 죽은 새들이었다. 창 아래에도, 벽 바깥에도. 무조건 돌진하여 자살한 새들, 목이 부러진 새들, 어디를 보든 천지가 새들 사체였다.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_58쪽, 「새」중에서
나무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냇은 대체 저 작은 두뇌와 날카로운 부리, 매서운 눈길 속에 몇 백만 년의 기억이 있기에 이토록 정확하고 집요하게 인류를 파괴하려 드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_79쪽, 「새」중에서
2월은 28일뿐인데도 어찌나 지루한지 몰랐다. 3월은 코지 카페에서의 모닝커피,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 친구들과 함께하는 영화관 나들이, 상점가에서의 근사한 마티니 한 잔이 전부인 우울하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나날이었다.
_89~90쪽, 「눈 깜짝할 사이」중에서
집이 그리웠다. 자기가 만들어낸 편안한 공간에 어서 들어가고 싶었다. 난데없이 망가져버린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바로잡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_174쪽, 「눈 깜짝할 사이」중에서
색깔은 중요하지 않았다. 푸른 렌즈의 흐릿한 빛 속에서 세상은 더 매력적이고 부드러웠다. 형태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므로 색깔은 아쉽지 않았다. 앞으로 색깔을 즐길 시간은 충분히 있다. 푸른색 사물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감각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새로 탄생한 것 같았고 오래 잊고 있던 세상을 재발견하는 기분이었다.
_192쪽, 「푸른 렌즈」중에서
“제 말이 맞죠? 색깔만 아니라면 렌즈를 끼고 있다는 것도 못 느끼시겠죠?”
시간을 좀 벌어야 했다. 마다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우유 잔을 잡았고 천천히 마셨다. 무슨 목적이 있어 가면을 쓴 게 분명했다. 렌즈 장착과 관련해 일종의 실험이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눈 수술을 받은 심약한 환자라면 가면을 보고 깜짝 놀라버릴 텐데 이건 너무 가혹한 실험이 아닌가?
_194쪽, 「푸른 렌즈」중에서
마다는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자칼, 하이에나, 독수리, 개와 부딪히면서 뛰었다. 세상은 동물들 차지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물들은 마다를 가리키며 소리 지르는가 싶더니 뒤를 쫓아왔다. 옥스퍼드거리를 달려가는 마다 뒤로 동물들이 따라 달렸다. 사방이 캄캄했다. 동물 세상에 홀로 남겨진 마다에게 빛은 없었다.
_235쪽, 「푸른 렌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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