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련한 독자에게조차 완벽하게 독창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소설은 극히 드문데,
『슬픔의 물리학』은 바로 그런 책이다.” _알베르토 망구엘(저술가, 『독서의 역사』)
장편소설 『타임 셸터』로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유럽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불가리아 작가’라는 명성에 더불어 부커상을 수상한 최초의 불가리아 작가가 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대표작 『슬픔의 물리학』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나는 이들이다”라는 기묘한 선언으로 문을 여는 이 소설은 공감과 공감의 소멸에 관한, 유기된 존재의 슬픔에 관한, 그 슬픔에서 비롯되는 일상의 숭고함에 관한 철학적이고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타인의 슬픔을 통로로 삼아 그들의 기억 속에 완전히 들어가버리는 일명 ‘병적 공감 증후군’을 겪는 한 소년이 있다. 소년 ‘게오르기’는 할아버지의 기억에도 들어가 그의 젊은 시절 비밀 연인에 대해 알게 되고 심지어 어린 할아버지가 제분소에 버려질 뻔했던 순간을 몸소 겪는다. 이 독특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콘셉트의 소설은 불가리아에서 출간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단 하루 만에 초판이 소진되었으며 불가리아 내셔널 어워드 소설 부문과 얀 미할스키 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국제적인 문학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
국내에 처음 출간된 고스포디노프의 작품은 부커상 수상작인 『타임 셸터』지만 현지에서 앞서 집필되고 나온 것은 『슬픔의 물리학』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 속에서 『타임 셸터』 세계관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타임 셸터』의 핵심적이고도 매력적인 캐릭터 ‘가우스틴’은 『슬픔의 물리학』에서도 역시 인상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게오르기의 친구이자 철학과 중퇴생인 가우스틴은 ‘개인 맞춤 시’ ‘콘돔 패션쇼’ 같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가득 채운 노트를 들고 자유롭게 세상의 이곳저곳을 떠돈다. 고스포디노프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과거의 기억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한, 층마다 과거를 재현한 클리닉’이란 프로젝트 역시 그 노트에서 시작되었으리라는 점을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의 물리학』은 이처럼 작가 고스포디노프가 소설이란 장르로 해내고자 한 사고실험의 시초이자 원형이며, 기발하고 시적인 설정과 그에 걸맞은 형식의 변주를 통해 우리의 생을 구성하는 슬픔의 입자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목차
비문碑文 007
프롤로그 009
1 슬픔의 빵 015
2 유기에 반대하며: M 사건 089
3 노란 집 113
4 시한폭탄(세상의 종말 이후에 열어볼 것) 185
5 초록색 상자 235
6 이야기를 사는 사람 279
7 전 지구적 가을 315
8 슬픔의 기초 물리학 369
9 결말 427
에필로그 435
감사의 말 441
옮긴이의 말: 공감은 슬픔을 부르고 슬픔은 이야기가 된다 443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Georgi Gospodinov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 유럽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불가리아 작가 중 하나로, 날카로운 통찰이 빛나는 유머와 아름다운 문장이 특징적이며 동유럽의 프루스트라고도 불린다. 1968년 불가리아 동부 얌볼에서 태어났다. 소피아대학교에서 불가리아어학을 전공했으며 시(詩)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인 『자연 소설』(1999)이 전 세계 23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세번째 장편소설인 『타임 셸터』(2020)로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이 상을 수상한 최초의 불가리아 작가가 되었다.
『슬픔의 물리학』(2012)은 타인의 기억 속에 잠입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화자 ‘게오르기’가 종말 이후를 대비하며 온갖 이야기를 수집한다는 독특한 콘셉트의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불가리아 내셔널 어워드 소설 부문을 수상했으며 PEN 문학상 번역서 부문을 포함한 여러 국제적인 문학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역자 : 민은영
고려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며, 옮긴 책으로 『타임 셸터』 『댈러웨이 부인』 『사라진 것들』 『거지 소녀』 『사랑의 역사』 『남자가 된다는 것』 『곰』 『앨프리드와 에밀리』 『칠드런 액트』 『프란츠 카프카의 그림들』 『존 치버의 편지』 『여름의 끝』 『에논』 『내 휴식과 이완의 해』 등이 있다.
20세기 후반, 후기 사회주의 체제 아래 궁핍한 불가리아에서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화자는 아버지가 사준 낡은 그리스신화 전집으로 세상을 배운다. 특히 사람과 황소 사이에서 태어나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 갇히게 된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에 감응하며 뜻밖의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의 시선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영웅이 처단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차가운 미궁에 홀로 버려진 가여운 소년, 그러니까 부모가 일터로 나간 뒤 컴컴한 지하방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야 했던 자기 자신과 닮은 존재다. 한편 그는 ‘병적 공감 증후군’이라는 독특한 증상을 보인다. 가족과 이웃은 물론 이름 없는 동물에서 할아버지가 약 대용으로 삼킨 민달팽이에 이르기까지 다른 존재의 경험에 완전히 몰입하고 심지어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고도의 공감 능력이다. 그러나 이렇게 타인의 고통과 생애를 제 것처럼 느낄 수 있던 소년은 성인이 되며 이 특별한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작가가 된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강박적으로 수집하며 이 잃어버린 능력을 보충하려 하며 온 세상에 흩어진 이야기의 파편을 모아 유기와 슬픔의 역사라는 방공호를 완성해 나간다.
『슬픔의 물리학』은 형식 자체로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얽힌 미궁 속을 걷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타임 셸터』에서 기억력 감퇴를 겪는 환자가 자신의 기억을 헤맨다면 우리의 어린 주인공 ‘게오르기’는 아예 타인의 기억을 헤맨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는 과거와 현재, 신화와 기록이 뒤섞인 작품의 무수한 길을 헤맨다. 페이지 곳곳에는 “순혈 장르”가 흥미롭지 않다는 게오르기의 선언에 걸맞은 일상 속의 정제되지 않은 다양한 텍스트와 이미지가 놓여 있다. 그러나 장르의 전형성을 탈피한 이런 기록을 읽다 보면 어쩐지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멜랑콜리가 찾아온다. 전쟁의 흔적,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슬픔과 상실감, 그 모든 유기된 것의 기록이 스멀스멀 몸속을 통과하는 감각을 느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게 된다. 그렇다, “슬픔의 응집 상태는 기체”이기에, 좌절을 예감하며 달려가는 이야기는 정확히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겹도록 외로운.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느껴온 감정, 그것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예전에 공중전화 부스에 검은색 마커로 쓰인 글에서 봤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역겹도록 외로워진다.” 나는 그런…… 역겨운 외로움이 나를 덮칠 때마다 머릿속에서 되풀이해 떠올리는 문장들의 모음집에 그 글을 추가한다. _본문에서
더불어 고스포디노프는 특유의 적실한 묘사와 유머, 유려한 문장으로 이야기의 실을 풀어나간다. 형식은 새로울지언정 모든 이야기의 중요한 실마리는 결국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 닿아 있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고스포디노프는 이 작품에서 ‘슬픔’, 영어로 ‘sorrow’라 번역된 불가리아어 단어 ‘tuga’를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자, 인생이 미끄러져 가고 있으며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모든 이유로 어떤 일들은 결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라 정의한 적 있다. 그러므로 이 책 『슬픔의 물리학』은 삶을 구성하는 강력한 욕망과 그 욕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으리란 깨달음, 이는 개인의 의지나 선택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는 무력감에 관한 이야기다. ‘슬픔’이 정녕 이런 것이라면, 세상을 잠식한 이런 정서가 비단 십여 년 전 한 동유럽 국가만의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만의 것도 아니다. 놀랍도록 매혹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거대한 슬픔과 숭고는 사실 거의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물리적’인 책 속에는 바로 그런 것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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