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구멍
사과나무 정원의 그림자
스타킹
붉은 방
블랙 오팔
네 번째 행성의 사나이
푸른, 푸르른 파편
푸른 가지 위 붉은 앵무새
검은 때
곡우
한밤의 짐노페디
대담 : 김나정(문학평론가, 소설가, 극작가)
상세 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장혜련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구멍」 으로 등단했습니다. 숭실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고,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대진대 문예콘텐츠창작학과에서 학생들과 소설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출판사 서평
감각의 언어로 파헤친 11편의 소설들
하드보일드한 문체, 삶의 비의를 드러내는 서사 구조
등단 23년 만의 첫 소설집
장혜련의 소설집 『한밤의 짐노페디』가 잉걸북스에서 출간되었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나 23년 동안 침묵을 지켜온 저자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은 인간 내면의 결핍과 고독, 그리고 타인이라는 끝내 닿을 수 없는 심연을 감각적인 문장과 밀도 높은 이미지로 그려낸 11편의 작품을 묶었다. 몸의 떨림과 체온, 냄새와 색채, 어둠과 상처의 감각이 살아 있는 이 소설집은, 설명보다 감각으로 먼저 독자를 붙드는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
『한밤의 짐노페디』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는 ‘구멍’이다. 실제 몸에 뚫린 구멍, 보석의 검은 심연, 타인의 눈동자, 사람들 사이의 빈자리와 방치된 죽음까지, 작품 속 ‘구멍’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바닥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어둠의 형상으로 반복된다. 작가는 이 어둠을 낭만화하지 않고, 피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집요하게 응시한다.
수록작들은 서로 다른 공간과 인물을 다루지만, 모두 상처 입은 몸과 흔들리는 삶의 순간들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구멍」은 몸의 감각과 욕망이 폭발하는 젊은 화자의 에너지를, 「사과나무 정원의 그림자」와 「붉은 방」은 아파트라는 일상적 공간에 스민 균열과 방관의 공포를, 「블랙 오팔」은 매혹과 집착이 한 인간의 고독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여준다. 유일한 SF 작품인 「네 번째 행성의 사나이」는 이러한 고독과 존재의 질문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하며, 「검은 때」는 사회의 낮은 곳에 놓인 삶들을 통해 바라봄에서 접촉으로 나아가는 윤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표제작 「한밤의 짐노페디」는 이 소설집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압축한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들고 다니는 ‘검은 비밀봉지’는 타인의 내면이자 삶의 비밀, 그리고 소설이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질문의 형상이다. 알고 싶지만 두렵고, 외면하고 싶지만 끝내 궁금해지는 마음. 『한밤의 짐노페디』는 바로 그 망설임과 응시의 순간에서 출발한다.
사라진 자들의 목소리를 찾는 11편의 짧은 서사
장혜련 소설만의 뚜렷한 인장
「구멍」은 피어싱과 라이브 클럽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화자가 몸에 구멍을 뚫으며 관계의 흔적과 욕망을 감각적으로 통과해 가는 작품이다. 몸의 상처와 자유, 성적 욕망, 자기파괴와 해방감이 뒤엉킨 강한 에너지가 특징이다. 「사과나무 정원의 그림자」는 고장 난 냉장고, 썩어가는 음식, 외도하는 남편, 아파트에서 벌어진 죽음의 기척이 한 가족의 균열과 불안을 서서히 드러낸다. 가정은 안식처가 아니라 붕괴 직전의 밀폐 공간으로 제시된다. 「스타킹」은 아내의 가출 이후 형석이 분노와 결핍, 유년기의 상처를 뒤섞어 떠올리며 특정 사물에 집착하는 이야기다. 사소한 물건 하나가 억눌린 기억과 비틀린 욕망을 끌어올리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붉은 방」은 화재 현장과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한 소방관이 붉은 불길, 향수 냄새, 사라진 아내의 흔적 속에서 현실과 강박 사이를 떠도는 작품이다. 붉은색은 욕망과 파국, 상실의 색으로 강렬하게 작동한다.
「블랙 오팔」은 진귀한 검은 보석을 손에 넣은 인물이 그것에 매혹되고 잠식되며, 결국 자기 삶의 공허와 고립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 보석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심연을 비추는 검은 응결체처럼 기능한다. 「네 번째 행성의 사나이」는 인간이 사라진 뒤의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을 기억하는 존재의 고독과 존재론적 질문을 밀어붙이는 SF 작품이다. 소설집 전체의 ‘어둠’과 ‘고독’이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된 변주처럼 읽힌다. 「푸른, 푸르른 파편」은 학교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문제적 학생과 그를 둘러싼 시선, 위선과 폭력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푸른색은 젊음이나 희망보다는 깨진 감정의 파편, 차갑고 날 선 거리감으로 남는다.
「푸른 가지 위 붉은 앵무새」는 상처 입은 인물의 몸에 새겨진 흔적과 사랑, 폭력의 기억이 앵무새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서정적이면서도 불안한 이야기다. 아름다움과 손상, 애정과 공포가 동시에 존재한다. 「검은 때」는 장애인, 노숙자, 가난한 이들의 삶이 더럽고 추한 표면이 아니라 서로 기대고 부딪치며 버텨내는 현실로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시선은 ‘바라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먹이고, 안고, 업는’ 접촉의 윤리로 이동한다.
「곡우」는 메마른 현실 한가운데서도 무언가 도착하기를, 비가 내리듯 삶이 다시 적셔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살아 있는 작품. 상실을 통과한 인물이 끝내 소멸이 아니라 도래를 기다리는 점에서 표제작과 함께 소설집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한밤의 짐노페디」는 ‘검은 비밀봉지’라는 인상적인 이미지 아래, 타인의 내면을 알고 싶지만 두려워하는 마음, 그리고 그 두려움을 견디며 끝내 질문을 놓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표제작이다. 소설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왜 인간에게 다가가려는 시도인지까지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각 작품은 서로 다른 이야기이면서도 모두 “사람이라는 알 수 없는 어둠을 끝내 들여다보려는 마음”으로 연결된다. 이번 소설집은 결핍과 상실을 오래 응시해온 작가의 시간, 그리고 다시 쓰고자 하는 열망이 응축된 첫 결실이기도 하다. 감각적이면서도 절제된 문장, 붉은색·푸른색·검은색으로 이어지는 선명한 색채 이미지, 몸을 통해 기억과 감정을 밀어 올리는 서사 방식은 장혜련 소설만의 뚜렷한 인장을 남긴다. 타인과 세계를 향한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질문을 멈추지 않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은 오래 남는 울림을 전할 것이다.
책 속에서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샘솟듯 치솟는 갈증. 세상이여, 다 녹아버려라. 비트를 탄 몸은 혹성 49의 외각을 선회하며 엔진을 예열시킨다. 지층을 지나 맨틀 아래로 단 한 번에 구멍을 뚫어야 하리. 이글거리는 맨틀에 뼈를 녹이며 그때 잠깐 생각해 볼 것이다. 나의 구멍은 왜 언제나 남자만을 원했던 것인가. (「구멍」, 15쪽)
냉장고처럼 차고 시원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문을 열면 종아리 사이를 감싸고 도는 서늘함. 느리게 떠돌던 수증기가 재빠르게 가랑이 사이를 타고 훅 밖으로 빠져나간다. 고개를 숙이면 코끝에 닿았다가 뒤통수까지 쏴하게 퍼져가는, 자신 안의 것을 신선하게 보존시킬 수 있는 냉랭한 기운. 그것은 일종의 쓸쓸한 기운이다. 언제나 그 앞에선 잠깐씩 아득해지는 차고 단단한. (「사과나무 정원의 그림자」, 39쪽)
그런데 늦가을 아니 가을도 다 지난 11월 중순 아내가 사라졌다. 형석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아내의 가출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파출소에 실종신고를 내고 각 병원의 응급실을 팔방으로 쫓아다녔다. 그리고 신문에 광고까지 냈다. 강진숙. 32세. 키 160cm. 마른 체형. 하얀 피부에 원숭이 귀 모양. 집 근처에서 실종됨. 아시는 분 연락해주시면 사례함. 사진은 올해 초 딸아이의 입학식 때 찍은 것을 오려냈다. 사진 속 그녀는 더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다. (「스타킹」, 65쪽)
그날 박은 여자를 죽였다. 빨갛게 타오르던 건담, 빨갛게 타오르던 소방차, 빨갛게 타오르던 여자의 얼굴. 빨갛게 타오르던 집. 모든 것이 질척하게 녹아내려 흐무러졌다. 조금 마음이 아팠다. 여자가 싫지 않았는데.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진한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이들을 볼 때마다 여자의 허연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자가 그리웠다. 봉긋하고 푸근했던 가슴이. (「붉은 방」, 95쪽)
이 년 전 겨울이었다. 그날도 천억만은 오가는 사람들의 행색을 살피며 유리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지상에서는 비가 오는지 사람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분주하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날씨가 궂은 날은 장사가 안 되는 날이었다. 비가 오는 날 보석을 사러 나오는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몇십 년간 장사꾼으로 살아온 본능이랄까 큰손님이 올 것 같은 확신 속에 천억만은 행인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블랙 오팔」, 112쪽)
5백 년 동안 비가 내린 지구.
세이건은 34호 정찰선의 끄트머리에 걸친 회색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 밖에서도 지구 표면을 핥고 있는 모래 폭풍의 소용돌이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모래 폭풍 아래 정말 물이 존재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이건은 물결이 이는 바다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 (「네 번째 행성의 사나이」, 138쪽)
정혜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 그 점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는 것 같았다. 가끔 노는 애들이 정혜를 찾아와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녀는 거의 매일 혼자 다녔다. 여느 날라리들처럼 몇 명씩 떼지어 몰려다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냥 평범한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말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 무게감은 사뭇 달랐다. (「푸른, 푸르른 파편」, 165쪽)
여자는 다시 16층의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무
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Lent et grave’ 느리고 무거운 가단조 선율……. 여자는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 가느다랗게 울리는 피아노 선율을 듣는다. 여자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길게 누르고 현관문에 귀를 갖다 댔다. 음의 파편이 희미하게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밤의 짐노페디」,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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