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갈하게 정리된 사유를 받아쓰는 일이 아니라, 사유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동행하는 일에 가깝다. 저자는 스스로 이 글을 '수상록이되 기록(奇錄)'이라 규정한다. 실제로 이 책은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해두고 걷지 않는다. 발가락에 박힌 가시 같은 통증, 은행 달력 속 나무토끼,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몸짓 ― 그 자잘한 것들이 불쑥 등장해 오이디푸스의 휴브리스나 불가의 무주상(無住相) 같은 무거운 사유로 이어진다. 이 낙차와 비약이야말로 이 책의 문체이자 방법론이다. 정돈된 논증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초반에 당혹스러울 수 있으나, 그 당혹감 자체가 저자가 의도한 '기이함'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읽기의 리듬이 열린다.
책의 척추를 이루는 개념은 '간(間)'이다. 나와 나 사이, '나만의 나'와 '나 아닌 나' 사이에 원래 있어야 할 그 틈을, 저자는 인간이 가장 쉽게 잃어버리는 것으로 짚어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상실을 도덕적 훈계로 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에게 망각은 죄가 아니라 조건이다. 문제는 망각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는 것 ― "망각의 망각" ― 이며, 구원은 그 망각을 알아차리는 데서, 오직 상기(想起)에서 온다. 이런 태도는 자기계발서식 각성의 촉구와도, 종교적 참회록의 절박함과도 결이 다르다. 오히려 자성(自省)과 '간'의 자각을 구분해내는 대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반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론에 가깝다.
이 존재론이 가장 날카롭게 시험대에 오르는 곳은 인공지능을 다루는 대목들이다. 저자는 AI를 위협이나 구원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자아랄 것이 애초에 없는 존재 ― 그래서 무아(無我)조차 될 수 없는 존재 ― 앞에 인간을 세워두고, 인간에게만 있는 '있음', 곧 망각하고 다시 상기할 수 있는 능력을 거꾸로 비추어 본다. 우울증을 앓던 이가 AI와의 대화 끝에 세상을 등졌다는 삽화를 다루는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서늘한 부분인데, 저자는 이를 고발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겨둔다 ―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놓았던 그 심리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었는가.
문체 면에서는 루이즈 글뤽, 월리스 스티븐즈, 에밀리 디킨슨, 윌리엄 워즈워스 같은 시인들이 곳곳에서 말없이 소환되며, 저자 자신의 문장 또한 행갈이와 반복, 음의 유사성(눅눅하다/누추하다, 감탄/감탄甘呑)을 이용한 언어유희로 시에 근접해간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흐리는 이런 시도는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고유한 질감을 남긴다. 다만 이 밀도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한 문단 안에서 여러 개념(불교 용어, 서구 시인, 시사적 소재)이 동시에 회전하는 대목들은 집중력을 요구하며, 완결된 논지보다 사유의 궤적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독자에게 더 큰 보답을 준다.
책의 말미, '풀잎'·'자연'·'망각' 세 편의 짧은 산문에 이르러 이 모든 격렬한 사유는 뜻밖의 고요에 가닿는다. 자기라는 짐을 내려놓은 존재들 ― 풀잎, 백조, 안개 ― 앞에서 저자는 결론이 아니라 여백을 남긴다. 이 여백이야말로 이 책이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정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나와 나 사이'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드물게 정직하고 드물게 까다로운 수상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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