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람답게, 언어를 언어답게, 삶을 삶답게
가장 인간적인 기술로 써내려간 소소하고 놀라운 우리의 오늘
소설가 김애란이 새 책과 함께 여름 인사를 건넨다.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2024)과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2025)를 펴내며 허구의 세계 안에서 지금 한국사회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리는 데 집중해온 작가가 이번에 새 이야기를 담아낸 그릇은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다. 소설 속 그 혹은 그녀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바로 그 장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작품을 써낸 작가 김애란의 생생한 다면(多面)과 만난다.
그 면면은 생활인이자 창작자, 사회인의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활인으로서 김애란은 제주의 너른 쉼터를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대도시에서와 다른 초록의 풍경을 눈에 담기도 하고, 오랜 시간 오해했던 누군가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창작자로서 인공지능 챗봇 챗지피티의 등장을 지켜보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성찰하기도 하고, 사회인으로서 우리 모두가 함께 겪은 코로나 시기를 돌아보며 진정한 자립과 타인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이 면면은 엄밀히 구분되기보다 서로 섞이고 간섭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바탕에는 공통적으로 몸과 마음의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서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겸허하고 유연한 태도가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태도는 ‘내가 되지 않는 꿈’이라는 인상적인 표현과 연결된다. 김애란은 말한다. 진정한 내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얼마나 해방적이냐고. 내가 되지 않는다는 건 나라는 작은 테두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고, 그렇게 나의 “농도를 조금씩 옅게”(19쪽) 만듦으로써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들어설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바람이 선선하게 드나들듯이 나라는 창문을 통해 다른 무엇이 부드럽게 오갈 수 있도록 여러 방향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놓는 것이다. 그 문을 통해 가족과 동료, 과거의 자신이 들어오고, 그 문을 통해 우연히 접하거나 적극적으로 들여다본 글과 영상이 들어오고, 그 문을 통해 우리가 함께 겪은 사회문제가 들어온다. 그러는 사이 조용하게 고여드는 생각과 확장되는 인식의 테두리를 모두 아울러 김애란은 다만 ‘그랬다고 적었다’라고 간명하게 표현한다.
그렇게 이번 산문집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로, 동시대인에게로, 사회 바깥으로 향하며 품을 넓힌다. 『그랬다고 적었다』는 김애란이 그저 좋은 소설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 곁에서 ‘우리의 오늘’을 써내려가며 함께 호흡하는 유일무이한 목소리를 지닌 작가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목차
1부 사람의 얼굴
내가 되지 않는 꿈 … 009
세 개의 빛 … 022
산문적인 세계에서 … 038
없는 자리 … 057
(부록) 죽지 않는 꽃 - 최인호청년문화상 수상 소감 … 086
2부 이야기의 얼굴
나의 유령 문학 유랑 … 097
절정부란 무엇인가 … 110
인간은 그런 존재 … 120
어떤 책은 … 123
아름다움은 자란다 … 126
없어지지 않는 말 … 133
그랬다고 적었다 … 138
(부록) 각각 한 손씩 빌려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삼십 주년 축사 … 144
3부 일상의 얼굴
모두의 일곱 해 … 155
숨 나누기 … 162
코로나 극장전 … 171
종말은 가볍고 투명하게 … 180
새 발자국, 삶 발자국 … 192
진짜로 가짜 같은 진짜 … 198
(부록) 다시 나가 놉시다 - 대산초등학교 백 주년 축사 … 208
저자소개
저자 : 김애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했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이중 하나는 거짓말』,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신동엽창작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한무숙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최인호청년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달려라, 아비』 프랑스어판이 프랑스 비평가와 기자들이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Prix de l’inapercu)’을 받았다. 2015년도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1위를 하였다.
언젠가 한 산문에서 “시간은 어떻게 생겼을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 쓴 문장입니다.
당시 삼십대였던 저는 제 나름의 답을 적어넣었습니다.
정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심상, 상상에 가까운 문장을요.
그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삶은 여전히 여러 얼굴로 다가와 제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얼굴의 잔영을 여러분과 나눕니다.
잔상인 동시에 자국, 흔적에 가까운 무엇을요.
그 안에는 당연히 웃거나 놀라는 얼굴, 그늘지거나 찡그리는 얼굴이 있습니다.
그것을 투박하게나마 3부로 나눠 책에 담았습니다.
그중 1부에는 점점 기억과 말을 잃어가는 한 인간과 언어능력이 날마다 발전하는 한 프로그램을 대비해 꾸린 글을 모았습니다.
몇 년 전에 쓴 글인데다 요즘 기술 변화 속도가 워낙 빨라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습니다.
은유와 비유로 이뤄진 구멍 많은 그물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구멍을 논리와 방어로 다 메워 커튼으로 만들지는 말자고 생각합니다.
전보다 그저 나이를 좀더 먹었을 뿐인데 몇몇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느라
문득 말이 줄고 눈이 깊어졌을 여러분을 떠올립니다.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시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인간의 문장으로 건널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2026년 한여름
김애란
책 속으로
긴 시간, 나는 나였다가, 또 나였다가, 충분히 나였다가, 혹은 나인 줄 알았다가 ‘내가 되지 않는 꿈’을 꾼다. 자연인으로서도 창작자로서도 그렇다. ‘진정한’ 내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얼마나 안심이 되나. 얼마나 해방적인가.
---p.20 「내가 되지 않는 꿈」 중에서
다 드러내고 다 털어놓는 대신 감추는 마음. 그리고 그걸 알아채고 헤아리는 마음. AI 앞에서 요즘 그런 마음을 자주 생각한다. 어쩌면 문학은 AI와 반대로 자신의 무지를 아주 길게, 다양한 방식으로 고백해온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p.36 「세 개의 빛」 중에서
다만 그동안 내가 진부한 주제라 여긴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왜 그토록 인류에게 오랜 시간 반복돼왔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사방의 모든 불이 갑자기 꺼진 듯한 상황을 맞으니까. 그러다 가끔은 저마다 영혼에 저축된 빛으로, 과거 자신이 받은 줄도 몰랐던 유산으로 눈앞을 밝히기도 하니까.
---pp.54-55 「산문적인 세계에서」 중에서
어떤 고민과 두려움 앞에서 농담하는 인간의 마음, 진담하는 인간의 심정을 아는 인간의 눈으로 앞으로도 세상을 공들여 바라보고, 서툴고 오류 많은 문장들을 계속 적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93 「죽지 않는 꽃」 중에서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한창 야간자율학습중인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당시 무슨 공포 소설집에서 읽은 ‘몸 없는 얼굴 귀신’ 이야기였다. 그날 나는 교실 안을 가득 메운 집중의 에너지를 느끼며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다 절정부에 이르러 결국 친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그때 그 희열, 권력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듣는 쾌락’과 ‘말하는 쾌락’이 일치하는 느낌. 나 역시 이야기의 권력에 기꺼이 휘둘리고, 그 힘을 사용하고픈 충동.
---p.99 「나의 유령 문학 유랑」 중에서
작가 또한 여느 창작자처럼 ‘창작자 자아’와 ‘생활인 자아’가 있고, 대체로 두 가지를 적절히 섞어 살아가지만, 글을 쓸 때 이따금 나는 예술과도 상관없고 생활과도 상관없는 진실한 상태, 순수한 상태로 고양된다. 나를 위대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아도 맑게 만들어주는 고양감, 주체가 된 느낌과 마주한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순간 때문에 많은 창작자들이 시간 대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작업에 그토록 몰두하는지도 모른다.
---p.131 「아름다움은 자란다」 중에서
누군가가 내뱉은 말 한마디로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가끔은 그 사람이 하는 말과 그 사람은 별 상관 없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p.135 「없어지지 않는 말」 중에서
인간은 대체로 진부하고 빤하지만 가만 보면 참 다채롭게 진부하고 제가끔 빤하다는 걸, 우리 삶과 노동이, 사랑과 일상이 얼마나 놀라운 구체성으로 이뤄졌는지 이해하고 살펴야 한다.
---p.139 「그랬다고 적었다」 중에서
만일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이 허무나 권태에 익숙해지는 걸 의미한다면 그걸 관리하는 기술이랄까 도구를 나는 문학을 통해 얻었다. 그리고 갈수록 문학에 대한 어떠한 환상이나 숭배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p.142 「그랬다고 적었다」 중에서
우리가 나눈 그 많은 대화들, 토론과 언쟁, 화해, 불안을 감춘 농담이 여전히 소중하게 다가오는 건 그게 꼭 이상적인 대화라서가 아니라 거칠고 부족할지언정 서로를 포기하지 않은 대화여서였습니다.
---p.148 「각각 한 손씩 빌려」 중에서
꿈에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며 삶은 여러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한 사람의 무게는 한 시절의 성취가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그 사람의 모순과 결함, 실패와 헤맴까지 다 포함한 채 재어진다는 것도요
---p.149 「각각 한 손씩 빌려」 중에서
타인에게 실망하고, 타인을 지겨워하면서도, 타인을 그리워하는 요즘. 오랜만에 타인을 만나 ‘고작 이런 거였나?’ 허무해하고, 다시 타인 덕에 일어서고, 타인에게 배워나가는 날들.
---p.179 「코로나 극장전」 중에서
누군가 소원을 빌 때 그가 믿는 대상은 해나 달이 아니라, 심지어는 신도 아니라, ‘삶’인지도 모르겠다고. 사실 국립과천과학관 채널에 달린 소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도 “좋은 일이 생기게 해달라”거나 “나쁜 일을 막아달라”는 청이 아니라 “힘든 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문장이었다.
---pp.189-190 「종말은 가볍고 투명하게」 중에서
그런데 이상하지. 거울 앞에 서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데, 어째서 나는 그때 내 얼굴을 분명히 그리고 여러 번 본 것 같을까?
---pp.199-200 「진짜로 가짜 같은 진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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