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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번호
403179
ISBN
9788956588346
출판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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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2026-09-25
페이지, 크기, 무게 229쪽, 140*220mm, 229g
목차
작가의 말 4

chapter 1 토렴하다
손톱 끝의 가시 12
토렴하다 16
방법은 고난보다 많다 20
잠깐 내리는 비 26
결 곱게 닳아진다면 31
노을 전시관에서 37
얼굴 화장 42
풍선이 하는 말 46
바람 소리 52
허공의 밥 56

chapter 2 기억의 공간
지지 않는 꽃 60
기억의 공간 64
바다의 등 70
오덕五德을 배운다 75
맷돌 호박 81
멈추는 순간에 85
불꽃 같은 인생 90
특별한 여행 94
서리꽃 99
책 읽어주는 남자 103

chapter 3 바지랑대의 추억
반내半川에서 110
용마름 114
엄마의 냄새 119
천상의 소리 123
태양의 집 127
바지랑대의 추억 131
하늘 영화관 136
후회의 늪 140
닮은 꼴 사랑 145
더위팔기 150

chapter 4 익숙해 가다
모래톱 156
영원히 잊지 않으리 160
익숙해 가다 164
변신變身 167
아이야, 장하다 171
역사의 상징물 175
풍화風化 179
화살 같은 기억 183
회오리바람 187
눈꽃 이불 190

chapter 5 길은 이어지고
절반의 성공 196
바닥에 대하여 201
소리 없는 울음 205
어쩌면 좋을까 209
떠나는 낙엽 212
일회용기 유감 215
무게 219
정신적인 지주였다 223
길은 이어지고 227
저자소개
저자 : 김기자
경북 문경 출생
<월간문학> 등단(2013)
한국문인협회, 충주문인협회, 충북수필,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원
대표에세이문학상 수상(2018)
수필집 ≪초록 껍데기≫ ≪시간의 그림자≫
충북일보 수필 연재

E-mail kkj8856@hanmail.net
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손톱 끝의 가시>

손톱 끝의 살갗이 따끔거린다. 그러다가 괜찮아지려니 했건만 며칠 내내 신경이 쓰이는 거였다. 병원에 가볼까 망설이다가 돋보기를 쓰고 들여다보아도 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건을 만질 때면 여전히 따갑기에 조심하는 날이 지속되던 참이었다. 차츰 통증이 무뎌질 무렵 조금 이상했다. 그 부분이 단단하고 볼록해지고 있었다.
이왕 병원에 갈 기회를 놓쳤으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이 든다. 아주 작은 바늘을 소독하고는 굳은살 부분에 조심스레 들이대었다. 아프지도 않다. 드디어 미세한 점 하나가 드러났다.
가시 조각이었다. 살갗 속에서 단단한 집을 짓고는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야 그 원인을 발견해 제거하니 속이 후련했을뿐더러 손끝이 어디에 닿든 두렵지가 않다. 신기하게도 가시는 그렇게 사라졌다.
티끌처럼 작은 가시가 제 몸을 숨기느라 보호막을 키웠나 보다. 묘한 생각이 든다. 사람이건 동식물이건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에 대해서다. 가시도 마찬가지였다. 살 속을 파고들어 굳은살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내 마음속에도 그런 일들이 없는지 돌아본다. 좋은 기억에는 여유로움이 있지만 아프고 불편했던 기억은 상처로 남아 두터운 살처럼 된다는 사실이다.
가시도 나름 합당한 방어 태세였을까. 그것을 보며 그동안 여러 가지로 겪어왔던 감정의 골들이 떠오른다. 지나온 날들 속에서 내 생각만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고집했던 갈등들이 피곤한 앙금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살갗을 키우며 가시를 감추고는 헤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웅크린 모습이 자꾸만 보인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기에 느끼는 고통도 차이가 있으리라. 훌훌 털어버리는 이도 있고 오랫동안 끌어안은 채 무거워하는 사람도 있다. 들여다보니 나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지만 작은 일에도 상처받는 마음이 항상 문제다.
겹겹의 세월을 살다 보니 이제는 유연해지고 있다. 아니, 마모된 몸과 마음을 둥글게 다듬으며 상처받지 않으려 조심스레 살아간다.
몇 해 전, 친구 사이에 어떤 오해로 인해 얼굴을 보기가 불편했다. 그 문제를 들추어서 옳고 그름을 따져볼 기회도 없이 지나버린 그 일은, 가시가 되어 내 안에서 굳은살을 키워갔다. 성격 탓인지 가끔 만나게 되어도 무심한 채 통증에서 멀어지려 애를 썼다. 그렇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닿았다. 수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노라며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웬걸, 친구는 전혀 다른 기억으로 지니고 있었다. 오해를 푸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 정말 손톱 끝의 가시가 빠져나간 기분을 맛보았다. 그동안 나 혼자 감정의 골에 잡혀 있었던 점이 부끄러웠다. 친구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저마다의 주장이 있겠지만 그로 인해 가시처럼 불편한 사이가 된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손톱 끝의 가시처럼 불편함과 굳은 마음을 지니며 살 것이 뻔하다. 거기에다가 나름 자기만의 방어기제로 합당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이런들 저런들 이제는 그러지 않고 싶다. 나이가 많건 적건 기본적으로 자기 삶의 반경이 평화롭기를 원한다면 낮은 곳에 자리 잡은들 어떠하랴.
하늘 아래에 피는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아름다운 꽃에서부터 땅에 밀착되어 피는 잡초까지 제 생명의 환희를 맘껏 표현하는 모습들이다. 한 생을 살아가는 거룩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시간이 길든 짧든 최선을 다하고들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자리한 감성의 함량이 아주 작은 것이라 해도 소홀히 여기며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해결할 것과 묻어둘 것들에 대한 의미마저 알게 된 기회였다. 살갗 속에 웅크린 가시가 또 있는지 살펴본다.

<토렴하다>

찬물에 씻어낸 면발이 탱글탱글하다. 그릇에 담고는 어릴 때 엄마가 하시던 대로 뜨거운 육수를 부었다가 따르기를 두어 번 한다. 국수의 맛을 내는 과정이 조금은 번거롭기는 해도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 이리 용하게 쓰일 줄 미처 몰랐다.
토렴을 거치지 않은 국수는 맛이 없다. 먹다 보면 뜨뜻미지근한 맛이 미각을 떨어뜨려서다. 따뜻하게 먹기 위해서는 그만큼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써야만 제맛이 난다. 그 과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삶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토렴을 해내듯 고난과 슬픔도 극복해야만 단단한 의식 세계에 머물게 되지 않을까.
문득 지나온 날들이 떠오른다. 음식이 맛을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처럼 미숙한 내 모든 부분에 대해서다. 떠밀려온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발견한 나를 되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고 분개하며 골몰했던 때가 많았다. 이제는 남은 인생이 조금이나마 성숙하게 변화되기를 노력하며 살고 있다.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 세월이 마흔다섯 해를 넘어섰다. 연습이 없는 삶은 무척이나 곤한 지경에 이르도록 했다. 물질 때문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 방식이 부딪히며 날 선 언쟁으로 치닫는 일이 빈번했다. 그 와중에도 계절을 닮듯 꽃피우고 열매 맺는 일은 나에게 순서대로 다가왔다. 어느덧 손주들이 늘어나고 함박웃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여긴다.
지나간 날들에 비해 지금의 처지가 모두 안온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가끔 일어나는 내 안의 반란을 잠재우는 일에 애써야만 한다. 천직 삼아 지켜온 자영업에서 손을 떼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집안에 급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소일삼아 꾸려가는 방법도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중이다.
인건비 부담에 종업원을 두지 않았다. 아직은 견딜만한 나이인지라 한껏 긍정의 힘을 일으키며 살아간다. 그런데 지독할 만큼 어이 상실에 빠질 때가 있다. 전부터 그랬듯이 일하는 과정에서 남편은 여전히 나를 주종관계처럼 대하곤 한다. 긴 세월 지나면서 좁히려 들지 않는 그의 습관이 굳어져 버린 상태라고 해야 하나. 언짢아도 되도록 참는다.
여전히 나는 토렴의 과정을 치르는 중이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가족이지만 하고 싶은 말 다 못하며 산다. 백발이 성성해지기까지 깨닫게 된 것은 서로가 하나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일만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와 나, 늙고 약한 몸으로 변하는 것을 비껴갈 수 없는 처지에 닿아 있다고 해야 하나.
표정만 보아도 무엇 때문인지 가늠할 만큼 서로를 확인하는 사이가 부부이다. 세상 끝을 누가 앞서갈지도 모른다. 아옹다옹 살았을지언정 그것은 토렴을 거친 지난날로 인한 자기성찰의 시간에 가까이 다다라서인 것 같다. 이제는 마주하며 나누는 이야기, 마주 앉은 밥상, 함께 걸어가는 길목이 예삿일이 아니기만 한 것을 깊게 알아간다. 부부간의 사랑만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종교와도 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곰삭아진 맛을 내듯 나를 꽉 붙들어 놓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도 한편 여러 분야의 토렴을 거치는 일이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삶의 진짜 맛과 인내를 모른다. 돌아보니 모두 무겁고 힘들게 여기는 날들을 잘도 견디며 살고들 있다. 혈기 왕성한 시간을 보내고 노을 진 강가에 앉은 기분이 이런 것인가 보다. 갑자기 내 손끝이 남편의 등을 토닥이고 있다.
오늘도 식욕을 당기는 국수를 삶는다. 익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다음 차례를 준비한다. 마지막 토렴을 하면서 새롭게 탄생 되는 국수의 맛으로 빠져든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사는 맛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럴진대 평범한 음식에서 알게 된 지혜를 내게서 남은 시간과 빗대어 새로운 다짐을 하고 또 한다. 세상을 향하는 발걸음에 두려움이 줄어들고 있다. 토렴이 거듭 동반될지언정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하기에.

<방법은 고난보다 많다>

잊히지 않는 다큐의 장면들이 있다. 두 남자의 얼굴과 함께 그들이 빚어내는 환한 이야기다. 어떤 신호탄이 되어 뇌리에서 지금껏 나를 흔들고 있으니 여전히 잊히지 않고 있다. 그들의 언어와 표정까지 세세히 기억할 정도로 내게 각인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다큐가 전해준 깊은 울림을 이렇게나마 글로 반추해 보려고 한다.
제목은 〈두 남자와 나무 이야기〉이다. 중국의 평범한 시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친구 사이로 한 사람은 양팔이 없고 또 한 사람은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장애인이다. 양팔을 잃은 사람은 세 살 때 감전 사고로 그리되었으며 장애인 예술단체에서 단장까지 하다가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시골로 왔다고 한다. 그 무렵 다른 한 사람은 채석장의 폭파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어버렸고 둘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다큐는 장애를 극복해 가는 인간의 한계를 그려내고 있다. 양팔이 없는 남자가 발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하는 삶에서 그 단어는 필요치 않았다. 한계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발을 손처럼 사용하면서도 너무도 밝은 표정은 정상인 신체를 가진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 성찰하지 못했던 점을 돌아보는 기회였다.
두 눈을 잃은 남자 역시 팔 없는 이와의 거리가 항상 좁았다. 볼 수는 없으되 친구의 팔이 되어주며 동행하는 풍경은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따뜻한 관계로 비추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둘은 서로 신체가 없는 부분에 대해 역할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우정을 넘어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아가는 매 순간이 힘겨운 도전이었지만 보는 이에게는 진지함을 그치지 않도록 했다.
두 남자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울창한 숲을 만들기로 작정하며 매달리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였다. 팔이 없는 이가 삽질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에 그랬다. 삽자루를 어깨와 고개 사이에 고이고 땅을 파는 광경은 초인을 넘어 한계란 없다며 설명하는 듯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역시 감각으로 열심히 해 내는 과정들을 보며 장애란 무색한 호칭에 불과했다.
심한 신체적 장애에도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그들의 정신이 심금을 울렸다. 가장 잊히지 않는 대사 중에서 팔 없는 이가 “방법은 고난보다 많다. 방법은 늘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 다 좋아질 것이다.”는 말 한마디는 이 다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벽하게 완성해 주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커다란 명언으로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맞닥뜨리지만, 이 한마디가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 같았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장면이 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이가 하는 말 역시 잔잔한 감동이었다. 척박한 곳에 나무를 심으면서 그가 그려내는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다. 희망이 활짝 고여 있는 표정은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돋보일 만큼 여유롭기까지 했다. 보이지 않아도 자세히 보면서 빚어내는 듯한 한마디 한마디에 꿈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마음의 눈이 밝았다. ‘산 밑에 복숭아나무를 심자’라고 하는 대목에서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거’라며 활짝 웃는 얼굴이 압권이었다. ‘산 중간쯤에 소나무를 심으면 사계절 내내 푸른빛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신선하기까지 했다. 더 위쪽에는 ‘활엽수를 심어 산을 아름답게 꾸미자’라는 대목에서는 이미 그곳은 그리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는 요동 없는 울림으로 충분히 가슴속에 자리를 잡았다. 방법은 고난보다 많고 방법은 늘 생긴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와 볼 수는 없으되 복숭아꽃을 그려내며 웃는 남자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내게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본다. 신체는 멀쩡하되 마음의 장애를 안고 사느라 작은 고난 앞에서도 무너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돌아볼수록 안타깝다.
결국 그들이 사는 그곳은 십오 년 후 푸른 숲이 되었다고 한다. 두 남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지구 저편으로 전해져 나에게까지 진지한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건 작건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은 고난이라는 실체를 피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를 때가 있다. 저마다의 형편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남자와 나무 이야기〉라는 다큐를 통해 정신적 건강을 충전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삶의 질주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까지 일깨워 놓았다.
혼자보다도 둘이기에 가능했으리라. 서로가 없는 부분을 채워주며 협력하는 자세 때문에 해낼 수 있었으리라. 그들의 삶은 숲을 가꾸는 일만큼이나 건강한 정신의 숲을 이루어, 세상을 향해 묵직한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고난보다 방법이 많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주인공 두 사람이 가진 불굴의 의지가 귀한 결과를 얻었다는 낭보였다.
이제 그곳의 숲을 향해 날아간다. 깃들어 있는 청량함을 한껏 누리며 수고를 치하한다. 잠시 멈추어 들여다보니 미완으로 얼룩진 내 삶이 부끄럽기 그만이다. 다시금 내게 허락된 생의 마당을 측량하기로 한다. 넓이와 깊이, 가진 것, 못 가진 것을 구분해 내며 어떻게 갈무리해 가야 할지 고뇌에 이르렀다.
‘방법은 고난보다 많다.’라는 이 말은 좌절한 이들에게 건네는 희망의 열쇠 같은 명언이다.

<바다의 등>

마주한 바다는 반가움의 표시인 듯 등을 들썩이고 있다. 그날따라 심한 바람 탓에 파도가 거셌다. 거침없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내 몸을 끌어당길 것만 같았다. 갯바위 위로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 예전에는 그저 낭만이었으나 지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여기는 동해 바닷가이다.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이따금 바다를 그리워했다. 차곡차곡 모인 삶의 피로가 그곳에 서 있으면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왠지 말 못 할 사연들도 바다는 맘껏 쏟아 놓도록 허락해 줄 것만 같았으며 다시 수면 위로 부유하지 않으니 안심이 되었다. 기대며 하소연하고 싶은 곳, 바다는 그렇게 넓은 등이 되어 언제나 나를 맞아 줄 것 같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다.
바다도 고단했을까. 수많은 사람이 바다에서 풀어놓았을 피로와 가슴 아픈 사연을 끌어안고 다독이느라 지쳐 있는 것일까.
파도가 점점 큰 너울로 다가와서는 부서지기를 반복한다. 그 소리는 신음 같기도 하고 정제된 노래 같기도 하다. 바다의 영령이 발걸음을 붙잡는 듯해서 그대로 서 있어야만 했다. 먼 곳까지 눈을 들어 끝없는 대화를 이어가기로 한다.
일흔을 문턱에 둔 나와 그를 넘어선 남편은 나란히 바다를 바라본다. 무심코 내 곁눈이 그의 등을 향하다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울컥해진다. 너울로 밀려오는 바다의 등과 남편의 굽어진 등이 겹치는 순간이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고 인정할 줄 몰랐던 삶의 무게를 발견했다고나 할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그도 바다만큼이나 육중한 몫으로 버텨냈을 등짐의 무게가 느껴졌다.
뜨거워지는 눈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다. 수년간 척추질환을 견디고 병원 치료를 받으며 견디고 있으나 서서히 키가 작아 있는 상태다. 그래도 이만하니 다행으로 여긴다. 집안의 기둥으로 온전히 의지해왔던 사람인 만큼 겉으로 건네는 말은 없지만 소중함이 더해온다. 가족이란 그렇게 서로가 등의 모양을 한 채 한 곳으로 향하는 바닷물결과 같았다.
결혼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자영업이란 길에 서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갖기도 여러 번이다.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품을 만큼 견뎌 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한때는 남편보다 내 등의 무게가 한층 힘겹다며 투정했던 일들이 소용돌이로 몰아치곤 했는데 이제는 저 바닷속으로 흔적을 감추어 가고 있다.
자영업, 그 말 뒤에 내게는 또 다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부부가 함께 식당을 운영하면서 이모저모 필요로 하는 손길은 아내인 나의 몫이 훨씬 많다는 사실에서다. 거기에다가 가끔은 비대칭적인 남편의 사고방식에 반기를 꺼내야 하는 불편함을 말로 다 표현 못 한다. 사소한 일로 다툼이 일면 강렬하게 되돌아오는 반응에 내 모습은 바닥과 가까워져야만 했다. 도리가 없었다. 어디에서든 질서는 있어야 하고 돌아볼 때 후회가 적기 위해서는 허공을 바라보는 버릇만 늘어갔다.
누구에게 하소연을 쏟아낼까. 심지어 자식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하는 노릇인 만큼 하루하루 살다 보니 여기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결혼이라는 성은 내가 기대며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생각이 엇나갔다는 것을 확인할 때는 이미 억척스러운 발걸음으로 변해버린 나를 발견한 즈음이다. 삶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고 앞만 보아야 했던 날들이 꿈 같다. 한세월 씨름하듯 지나고 보니 지금은 작아진 남편의 등이 나에게 연민을 품도록 한다.
질병과 동행하며 사는 남편이 안타깝다. 새삼스럽게 솟아나는 내 감정의 변화가 나를 작아지도록 만들었다. 한 사람의 저무는 일생이 바다만큼이나 거대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옥신각신한 삶의 테두리였지만 그가 지닌 중요한 몫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등을 중심으로 가족의 울타리가 형성되었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소중함이 어떠한지 알게 한다. 그만큼 남편은 필요한 사람이었다. 육체의 등이 점점 낮아질지라도 가족을 지탱하는 힘의 주자가 확실했다.
부부의 등을 맞대고 살아온 세월을 펼쳐본다. 수없이 부서지는 파도가 바다로 돌아가서 다시 등으로 만들어져 밀려오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 안에 녹아든 희로애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가족이란 기대는 힘과 마주하는 힘의 균형이 순간순간 흩어지는 파도처럼이었어도 하나가 되는 물결이었다. 한때는 남편의 등이 더 크면서 넓기를 원했던 시간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모두 희미해져 가고 있다.
새롭게 발견한 남편의 등을 바라본다. 삶의 의욕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 힘닿는 곳까지 응원하고 싶다. 앞날의 일은 가늠할 수 없다. 누가 먼저 이별을 고하여야 할 상황에 이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갈수록 약해지는 남편의 몸과 마음을 붙잡아 주어야겠다. 오히려 내 등에 기댈 수 있도록 힘을 키워야겠다. 파도 소리가 이제는 경쾌하게 들린다. 저만큼 밀려오는 바다의 등이 나를 위로하며 감싸는 듯하다. 부부란 그렇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공동체였다. 혼자의 독백이 파도에 휩쓸려 부서지고 또다시 등으로 마주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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