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믿지 않는 것, 그것을 믿어보는 무모함
멀게만 느껴지는 내일, 그것을 미리 꿈꾸는 용기
더욱 다채로워진 색채로 다시 만나는 김연수의 세상
특유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삶에 대한 폭넓은 통찰을 보여주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김연수의 신작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문학동네에서 펴낸다. 이번 소설집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문학동네, 2022) 이후 4년 만에 묶어내는 일곱번째 소설집으로, 한층 스펙트럼이 넓어진 9편의 소설이 실렸다.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의 그림에 대한 가상의 일화를 담아내어 작가 특유의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낸 소설 「눈 내리는 삼일포」부터 야구와 서커스, 판소리 등 서로 멀어 보이는 키워드를 자연스레 꿰어나가며 우리 인생의 목격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임을 울림 있는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 「우리 인생의 목격자」,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정신을 ‘업로드’하길 택한 손녀를 찾아가는 할아버지의 여정을 다룬 소설 「동풍이 어디로 흩어지는지」처럼 근미래를 배경으로 섬세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이야기까지, 이번 소설집에서 김연수는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소재를 아우른다. 그와 더불어 김연수는 창작자로서의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예술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예술에 효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끝없는 질문을 통해 어렵게 얻은 대답이 이번 소설집에 실려 있다.
『눈 내리는 삼일포』에는 특별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다. 김연수는 2년 전 여름, 서촌의 한 식당에서 열린 모임에서 그림책 작가 이수지가 만든 동명의 그림책 『눈 내리는 삼일포』를 만나게 된다. 그림책 『눈 내리는 삼일포』는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의 그림 〈고성삼일포도〉에서 출발한다. 간송미술관에서 보관을 하던 중 좀이 스는 바람에 그림에 구멍이 났고 그 구멍들을 보고 이수지 작가는 눈 내리는 풍경을 떠올려 그것을 한 권의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이수지 작가가 식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주는 동안, 김연수는 생각했다. “그림책을 끝까지 보기도 전에 뭔가 쓰고 싶”(‘작가의 말’)었다고. 그렇게 〈고성삼일포도〉에 관한 가상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 「눈 내리는 삼일포」가 탄생했다. 「눈 내리는 삼일포」에는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표제작으로 결정되었고, 자연스럽게 이수지 작가가 이 소설집을 감싸는 표지 일러스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공연창작자 이자람이 노래하는 듯한 특유의 목소리를 담아 『눈 내리는 삼일포』에 대한 감상을 우리에게 전하며 이번 책은 마치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여러 창작자들이 한 무대에 선 듯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목차
우리 인생의 목격자
수면 위로
조금 뒤의 세계
눈 내리는 삼일포
용인에서 보낸 편지
신들은 토끼산을 떠났다
동풍이 어디로 흩어지는지
그리고 밤과 가을이
신의 마음 아래에서
저자소개
저자 : 김연수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소설집 『스무 살』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의 일』 『시절일기』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할 때,
들리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김연수는 작가 고유의 인장인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장을 통해 “그림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눈 내리는 삼일포」, 142쪽)으로서 삶의 진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눈 내리는 삼일포」는 학질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해 약을 구하러 수의 어른을 찾은 가난한 선비 덕암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궁궐의 어의인 수의 어른은 학질 치료제인 금계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느냐며,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덕암을 돌려보내려 한다. 그때 덕암이 자신이 약값으로 가져온 것이 있다며 보따리를 풀어 그림 하나를 꺼낸다. 수의 어른은 귀한 그림이라면 얼마든지 사들이는 그림 수집가인 터라 덕암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덕암이 꺼내 보인 그림은 구도와 필법이 아주 아름다웠으나 보관을 잘못한 탓인지 좀이 슬어 구멍이 나 있었다. 수의 어른은 그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금계륵을 받아가겠다는 것이냐며 나무라지만 덕암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이것은 망가진 그림이 아니라 화가가 일생의 깨달음을 담아 완성한 그림이라고 말한다.
덕암의 주장에 따르면, 이 그림에 구멍을 낸 사람은 바로 화가인 현재다. 현재는 왜 그림에 구멍을 냈을까? 덕암은 현재가 그림에 구멍을 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놓으니까 흡사 눈 내리는 삼일포를 그린 것 같지 않”(143쪽)으냐고. 구멍은 그림 속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처이지만, 그림 밖에서 보면 그것은 눈으로도, 빛이 드는 통로로도 보인다. 그림을 밖에서 바라볼 때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 생겨나는 것처럼, 인생도 한발 물러서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같은 쪽) 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현재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끔찍하다고 해도, 예술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본다면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을 김연수는 은근한 어조로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조금 뒤의 세계」에도 등장한다. 「조금 뒤의 세계」 속 화자는 십 년 넘게 소설을 쓰지 못한 채 불면에 시달리는 소설가이다. 대구에서 강연을 마치고 오른 서울행 KTX 열차에서 그는 오랜만에 졸음이 밀려드는 걸 느끼며 눈을 붙인다. 눈을 감고 있던 시간은 일 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는 숙면을 취한 듯 가뿐한 마음으로 깨어난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옆자리 여자의 시선을 의식한다. “소설 쓰시는 분, 맞죠?”(86쪽) 이어지는 여자의 설명은 꿈속처럼 신비로우면서 흥미롭다. 여자는 자신이 조금 뒤에 들릴 아기 울음소리를 미리 듣고 잠에서 깼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잠시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었을까? 그는 십 년 넘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소설가이기에,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기로 한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는 비결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어린 시절, 술에 만취한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 “예상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려고 애를 썼”(101쪽)고,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에는 분명 다른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무섭게만 여겨지는 현실 너머에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상상하며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낸 것이다.
「우리 인생의 목격자」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생의 목격자」의 주인공 이선희는 남자아이들이 오빠의 글러브를 빌리러 올 때 자신도 야구에 끼워주면 빌려주겠다고 이야기하는, 야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다. 언더스로를 배워 마구를 던지는 선희의 볼에 그 어떤 남자아이도 배트를 내지 못하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취재하러 온 기자는 ‘여자가 무슨 야구를 하느냐’는 식으로 반응하며 선희를 무시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선희는 미국에서 여자 프로 야구가 출범하고, 한국인 선수들이 지명을 받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한다. 첫 여자 프로 야구 선수들의 탄생을 보며 선희는 자신의 어릴 적 꿈을 떠올린다. 최고의 투수가 되고자 했던 그 꿈을. 그리고 “비록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또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니게 됐”(32쪽)다고 읊조린다. 이처럼 김연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못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여러 이야기를 거쳐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 가능성들은 모두 붕괴되고 이 삶만 나의 삶이 됐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미래가 상상을 통해 가능해진다면, 거시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삶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생기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가능성들은 어떻게 현실로 실현될까. 「그리고 밤과 가을이」에는 부고 기사를 담당하는 신문기자 정기가 등장한다. 정기가 부고 기사를 쓰려는 사람은 발명가 다나카 겐지이다. 다나카 겐지의 회고록에는 ‘웜홀 창문’이라는 흥미로운 발명품이 등장한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한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각각의 창문을 통해 보여주는 발명품으로, 다나카 겐지는 웜홀 창문에 떠오를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육가공업체를 운영하며 정치인이 된 모습, 추리소설가가 된 모습 등 자신의 다양한 미래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른 현실이 얼마든지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현실만이 실현된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라”(265쪽)고. 결국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이 회고록을 읽은 정기도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정기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대로 유력한 정치인의 부고 기사를 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SF 소설가의 부고 기사를 쓸 것인지 고민한다. 고민은 한 가지 더 있다. 정기는 언젠가부터 딸 민지와 거리가 멀어진 것 같다고 느낀다. 민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부고 기사도, 민지와의 관계도 어느 한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정기의 삶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다. 정기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선택의 기로에 선 인물들은 또 있다. 「신의 마음 아래에서」 속 선재와 「동풍이 어디로 흩어지는지」 속 규철의 상황이 그렇다. 먼저 「신의 마음 아래에서」 속으로 들어가보자. 죽은 이의 마음을 복원해 안드로이드에 이식하는 시대. 안드로이드에 이식된 중범죄자의 마음들이 태양 폭풍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기 전으로 초기화됐다는 소식이 전국에서 들어온다. 인과수사과 요원인 선재는 범죄자들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그들의 머리를 부수는 임무를 받는다. 첫번째 타겟을 찾아 양양으로 간 선재는, 아들의 마음이 이식된 안드로이드를 지키기 위해 소총으로 무장한 한 어머니 앞에 서게 된다. 선재는 과연 그 안드로이드에게 총을 겨눌 수 있을까. 「동풍이 어디로 흩어지는지」에는 육체를 버리고 자신의 모든 데이터를 업로드해 정신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규철의 손녀인 지은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지은은 젊지만, 유전병을 비롯해 육체의 고통을 오랫동안 겪었고 이미 자신보다 일찍 죽어 데이터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엄마와 아빠를 그리워했기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육체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규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데이터의 세상에서 사는 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손녀가 죽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는 규철은, 지은이 자신의 정신을 업로드하려는 한 기업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과연 규철은 지은의 업로드를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게 지은에게 더 좋은 일이 맞을까?
인물들이 하는 선택은 이들의 삶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작은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미래의 관점에서는 아주 큰 전환점이 되는 선택일 수도 있다. 「수면 위로」에는 물고기에 대한 우화가 등장한다. 물고기는 물속에서만 산다. 그렇기 때문에 물 바깥의 세계가 어떤지 모른다. 물고기는 수면 바로 근처까지 가서 그 너머에 무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것을 하늘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하고 다시 물속으로 되돌아간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모두 각자의 삶 속에 갇혀 산다. 어떤 선택을 할 때에도 필연적으로 우리는 각자의 관점 속에 갇힌 채 무언가를 선택한다.
하지만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삶 바깥에는 더 많은 가능성이, 또다른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다시 물속으로 돌아가는 물고기처럼 기존의 삶에 갇히는 대신, 수면 밖의 세상에 이름을 붙여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은 잘 체감되지 않는 먼 미래를 상상하며 용기를 내어 새로운 선택을 해보면 어떨까. 김연수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림 바깥의 구멍으로 스며드는 빛을, 이루지 못한 꿈이 이루어지는 먼 훗날을 상상하며 자신의 삶을 바꿔나간다. 그 상상은 무조건적인 낙관과는 다르다. 다만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생각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현재를 광활한 미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그림 속 구멍으로 스며드는 빛처럼, 수면 바깥을 상상하는 물고기처럼. 이 책을 덮은 뒤의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거든요.”(「조금 뒤의 세계」, 87쪽) 김연수는 마치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목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전에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멜로디처럼, 김연수의 소설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유리컵 몇 개를 떨어뜨렸다. 컵들은 서로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 순간 나는 중심을 잃고 오른발로 깨진 유릿조각을 밟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상처를 꿰맸다. 이틀에 한 번꼴로 병원을 다니며 검진과 소독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뜨겁던 여름의 열기는 조금씩 누그러졌다. 가뭄을 걱정하던 남부 지방의 메마른 땅으로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자주 뭔가를 영영 잃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상처는 조금씩 회복했다. 병원을 다닌 지 이 주가 되자 의사는 내게 그만 와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내게서 뭔가를 뺏어가고 또 뭔가를 주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시간이 내게서 뭔가를 빼앗아갈 때는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러나 뭔가를 줄 때는 또 얼마나 다정했는지.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울고 또 웃으리라.
살아 있는 한, 나는 시간의 여행자니까. _‘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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